한국동란시 임시수도로 역할을 하였고, 60년대에는 피혁, 방적 등의 공업도시로 발전해 나갔다. 1970년부터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과학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여, 1993년도에 ‘대전엑스포’이후 첨단과학 연구도시로서 발돋움을 하려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대전의 발전상이 그 흐름을 따라 대내외적으로 나타내는 대전의 상징물은 무엇인가? 전후 50년대에는 일제 강점시 시청이었던 중앙통의 상공회의소 건물, 60년대에는 대전부르스와 함께 등장한 대전역사, 70년대에는 용전동 로터리에 세워져있던 ‘대전탑’이 상징하기도 하였다.
한문으로 큰 대자를 상징한 대전탑은 교통신호체제가 바뀌면서 사라졌고, 80년대에는 온 국민이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치르면서 ‘호돌이’ 마크가 우리 주변을 사로잡았고, 9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전엑스포를 치르면서 세운 한빛탑(당초높이 193m)이 새로운 상징물로 부상하였다. 짧은 공정 탓으로 높이를 100m 낮게 설치된 ‘엑스포탑’이 뛰어난 디자인 요소를 하고 있음에 세계 유일의 쌍아치교인 엑스포다리와 함께 갑천주변이 이제는 대전을 상징하고 있다.
그 외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혜천대학의 종탑이나, 건립당시 동양 최대의 규모였던 영렬탑, 미군기지로 기억되는 우리나라 위성 통신의 상징인 식장산 통신탑 등이 있으나 상징물로 내세우기에는 명분이 모자란다.
유명한 도시들의 상징물을 살펴보면-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런던의 국회의사당, 로마의 콜로세움, 파리의 에펠탑,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 이집트의 피라미드, 인도의 타지마할 등 건축물들이 도시의 상징물이기도 하고 그 나라를 대표한다. 가까운 일본은 오사카성, 중국은 천안문 광장이 대표한다면 서울은 남대문이 쉽게 떠오른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발달한 도시의 대부분은 타워를 세워 도시의 상징물로 내세운다.
그예로 토론토나 시애틀, 오클랜드, 상하이 등의 도심에 세워진 탑은 전망대와 통신탑의 기능을 함께 하고 있다.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세운 에펠탑을 본 후로는 엑스포를 마치고 상징화되는 예가 많아서 한빛탑에 대한 기대도 많았지만, 현재의 한빛탑은 높이도 낮고 전망대와 통신탑의 기능 어느 하나도 담당하지 못하고 있다.
도시인구가 150만으로 대전과 비슷한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의 경우, 96년경 남반구에서 가장 높은 높이 240m의 스카이타워를 세웠는데, 설립 당시 가장 훌륭한 건축물과 가장 몹쓸 건축물로 동시에 선정되는 진기록을 보유하였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모든 시민들의 도시 어디에서나 보이는 탑을 중심으로 활동이 전개되는 튼튼한 모습이다. 새롭게 계획하여 세워진 이 타워는 시민의식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장소적, 상징적 의미가 상당히 크다.
대전의 경우, 원도심 활성화를 꾀하려고 전 지역이 재개발의 의지로 꿈틀거리고 있지만 이렇듯 기준없는 욕구에 따른 난개발로 십년이 흐른 후에 남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많은 아쉬움과 절제를 필요로 한다. 우리 스스로 발췌한 상징물을 설정하여 온 시민의 뜻을 모아 힘껏 만들어 가면서 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기틀을 다져야 한다.
경제가 어렵다고들 야단이다. 이러한 시절에 웬 타령이냐 겠지만, 이제는 모두 함께 후손에게 자랑스럽게 넘겨 줄 역사로 마름질하여 아름다운 유산으로 넘겨줘야 한다. 이왕이면 인근에 활성화된 상가와 시민들이 모이는 광장을 만들어 느티나무도 간간이 심어 놓아야 겠다.
보문산 전망대에 세우든, 도청 뒤쪽의 서대전 청년광장, 아니면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면서 재개발되는 은행동이나 중동의 한복판에 가장 높고 크게 세워 시민 모두가 함께 만들어 사랑하는 대전의 상징물로 가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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