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진의 충청비사]68.해방이전 이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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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용.정신대...침략전쟁에 유린된 인권

  • 승인 2006-08-10 00:00
  • 前 중도일보 주필前 중도일보 주필
무기 재료로 놋그릇.수저.요강까지 강탈
학생들 배고픔.중노동.군사훈련 ‘3중고’
‘창씨개명’에 성(姓).언어마저 말살당해



대륙침공과 ‘전시체제’




중국대륙 침공을 노리던 일본군은 ‘노구교 폭파’를 빌미로 중·일 전쟁을 유발,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는 한편 끝내 ‘태평양전쟁(2차 대전)’까지 일으키며 조선인을 들볶기 시작했다. ‘지원병’이라 해서 젊은이는 징병에, 40~50대 장년은 ‘징용’으로, 젊은 여인은 ‘정신대’로 끌어갔다.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농가의 식량을 수탈하는 한편 무기의 원료라 해서 가정의 놋그릇과 수저, 심지어 요강과 징, 꽹과리까지 거둬갔다. 그 바람에 가정에선 표주박에 대나무 수저를 식기로 대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순사와 면서기들은 농가를 수색, 아궁이속에 숨겨 놓은 쌀자루까지 뒤져 가는 바람에 농가에선 아카시아 꽃을 훑어다 쪄먹는 예가 허다했다.

그때 桂소년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선생님 말씀대로 일본이 전쟁에 이기려면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철이 없는 소년이었다. 식량을 빼앗아 가고는 만주에서 들여 온 콩깻묵〔大豆粕〕을 배급했으나 그것은 가축에게 먹이는 사료였다.

그 무렵 소학교 학생들은 군인 가정의 모심기, 보리밭 밟기 등에 동원되었고 학교 운동장에 풀을 깎아다 퇴비를 만드는가 하면 노는 땅을 개간, 고구마를 심어 수확 때는 ‘품평회’를 열어 그것을 성적부에 반영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논밭에서 진종일 엎어져 일한 아낙네들을 밤마다 마을 회관에 불러내어 “차렷!, 앞으로 가. 뒤로 돌아가!”하는 제식훈련까지 시켰다.

그리고 징병, 징용에 나가는 대열을 환송하기 위해 신작로 연변에 나가 ‘일장기’를 내흔들어야 했고 ‘센닌바리(千人針)’라 해서 수건에 천명의 여인이 돌아가며 한 땀, 한 땀 바늘로 떠서 군인에게 보냈다. 무운을 빈다는 뜻인데 우리 풍속으로 따지면 ‘부적’과 같은 것이었다.



桂소년의 엉뚱한 꿈




중·일 전쟁이 터지자 일제는 조선어 말살정책을 쓰는 한편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고 나섰는데 그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민족 구성의 ‘3대 요소’라면 ①‘혈립(血粒)’과 ②언어 ③영토를 꼽기 마련인데 땅을 빼앗긴지는 이미 오래고 언어와 성(姓)까지 잃을 판이라는데 세상은 온통 어수선했다. 그때 땅을 치며 통곡하는 이가 속출했지만 대세는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면사무소에는 창씨 전문가가 들어앉아 이를 추진하는데 일부에선 혈립(血粒)의 아쉬움에 묘한 성(姓)으로 바꾸는 사태가 일어났다.

송 씨는 본관이 은진이라 해서 온신(恩津), 전주 이(李)씨는 왕족인 탓에 ‘구니모토(國本)’ 순흥 안(安)씨는 ‘야스타(安田)’ 최(崔)씨는 ‘야마요시(山 )’, 가(賈)씨는 ‘니시가이(西貝)’라 고쳤고 계(桂)씨는 그대로 쓰고 ‘가쓰라’라 불렀다. 태평양전쟁 초기 일본군은 ‘북경’과 ‘상해’를 순식간에 점령하고 필리핀 ‘마라이(馬來)’, 싱가포르를 거쳐 인니(印尼)로 쳐들어갔다. 일본공군은 영국함대가 자랑하는 ‘프린스, 오프’, ‘월리스’ 쌍둥이 전함을 격침시켰고 육군은 인도를 향해 미얀마에 ‘콰이강의 다리’ 건설을 서둘렀다.

이때 동남아 주둔 영국군은 완전히 패하고 무조건 항복을 했다. 황복 조인식(調印式) 석상에서 일본군 사령관 ‘야마시타(山下)’중장은 ‘조건부 항복’을 내세우는 영국 ‘퍼시벌’ 장군에게 탁자를 치며 일갈했다. ― 무조건 항복은 Yes냐 No냐? ― 라고. ‘야마시타’는 영어실력이 변변치 않았던지 앞뒤 단어는 일본말로, “예스냐? 노우냐?”만을 다그쳤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야마시타’ 사령관은 나중에 ‘퍼시벌’ 장군한테 똑같은 수법으로 항복하고 종전 후 도쿄 군재(軍裁)에서 사형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개전 2년이 지나자 전세는 서서히 역전되어 미 · 영군이 노도처럼 북상을 했다. 그때 일인과 조선인은 입만 벙긋하면 ‘타도 귀축미영(打倒-鬼畜米英)’을 외쳐댔다. ‘귀축’이란 잡귀와 짐승이라는 뜻이다.

개전초기 桂소년은 턱없이 들 떠 황군이 승리하길 기원하며 군가를 불러댔다. / 자바는 상하(常夏)의 나라 / 남녘 하늘에 번쩍이는 십자성 / 아득한 조국이여 / 새벽녘에 비노라 / 등을 부르며 신이 나 있었다.

학교정문과 이발소, 면사무소, 우체국 벽에는 황군이 진격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는데 이무렵 소년의 아비 桂주사는 일본인 기술자와 함께 학교건축, 포구증축 등을 했고 멀리 인천, 황해도를 오가며 돈벌이에 열중했다. 그는 이 고장에서 맨 먼저 문을 연 읍 소재지 학교 1기 졸업생으로 일본어를 아는데다 사교성이 뛰어나 일인 기술자와 늘 어울려 다녔다. 딱히 무슨 직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유지 축에 낀다 해서 ‘계주사’라 불렀다.



덩달아 날뛴 소학생들




일제는 1930년대 말부터 교과서를 전면 개편, 전쟁이야기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위한 일본역사 내용으로 바꿔쳤다. 예를 들면 중국대륙에서 전차대를 몰고 큰 공을 세웠다는 ‘니시즈미(西住)’ 대위의 무용담과 몸을 던져 적의 도치카를 파괴한 ‘폭탄3용사’ 이야기, 러 · 일 전쟁 때 여순(旅順)에서 승리한 ‘노기(乃木)’ 대장, 동해에서 ‘발틱’함대를 전멸시킨 ‘도오고(東鄕)’ 제독의 승전보 같은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심지어 전쟁 말기에는 조선 지원병 ‘이인표(李仁杓)’ 상등병의 장렬한 전사 장면까지 선전하고 나섰다. 충북 옥천 출신 이인표는 해방 후 살아서 돌아왔지만…. 특히 수병의모(水兵の母)라는 교과서 내용은 학예회 때마다 단골메뉴로 등장했는데 桂소년은 주연을 맡았다. 함상에서 수병이 어미의 편지를 받고 훌쩍거리며 우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 편지 내용이란 이런 것이다. 군인이 되어 풍도(豊島) 앞바다 전투에도 못 나가고 ‘위해위(威海衛)’ 해전에도 참전 못한 자식을 꾸짖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국어책에 군견(軍犬), 공고(金剛)와 나지(那智)이야기까지 실었는데 이 두 마리 군견은 적진을 교란시키는 한편 중국 병을 물어뜯고 적으로부터 사살 당한 그 용맹성에 천황이 훈장까지 내렸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일제는 전쟁에 미쳐 날뛰었다.

桂소년은 이 무렵 학교를 결석하거나 조선말을 쓰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3학년 때는 그 난해한 천황의 ‘전쟁포고문’ 전문을 전교생 중 유일화게 암송, 교장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일본교장 자녀보다 일본어를 더 잘한다 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桂소년의 집 사랑채에는 선생님이 세 들어 살았고 이웃에는 ‘일본어 강습소’가 있어 6살부터 일어 기초를 닦았는데 이런 환경 탓에 조선말을 쓸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 바람에 경성(서울)에서 발행하는 일어판 ‘소학생신문’에 글을 실어 학교가 떠들썩한 일도 있었다. 그 후 소년은 그 신문에 발표된 함경도 경성군 모 학생, 서울 계동학교 학생, 그리고 충북 보은군 어느 학교 학생과 엽서 교류를 하는 등 교만을 떨었다.

또 학교 숙직실에 가면 교사들을 위해 비치해 놓은 책들이 있어 재미나게 읽어댔다. 거기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 ‘가난한 사람들’, ‘나폴레옹전’, ‘노기(乃木)장군’, ‘나츠메(夏目)’의 소설집, ‘도련님’, ‘풀베개’, ‘빅토르 위고’의 ‘불쌍한 사람’, ‘기쿠치 캉’의 ‘육지의 인어(人魚)’ ‘금색차야(金色叉夜)’ 같은 감미로운 소설도 있었다. 물론 일어판이다. 작품의 깊이는 몰라도 桂소년은 무작정 읽어댔으니 그야말로 남독이었다.

‘기쿠치 캉’ 소설내용은 이러했다. 가난한 대학생이 가정교사를 하는데 그 집 딸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한 끝에 장대비를 맞으며 전봇대에 기대어 괴로워하는 대목에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것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라는 ‘프로’ 소설이라는 걸 안 것은 세월이 흐른 뒤 일이지만….

이렇듯 뜻도 모르며 읽은 책 이야기를 떠들어대자 교장 딸 ‘하루미(波留美)’의 “네가 부럽다!”는 말에 천하를 얻은 듯 밤잠을 설친 일도 있었다. 학교에서 ‘작문’시간과 화술(話方)시간은 으레 桂소년의 독무대였다.



소학생도 ‘군속’으로




전시하의 갯마을 소학교 학생들의 희망사항은 대체로 ‘훌륭한 군인이 되겠다’는 것이고 어느 여학생은 ‘규고항(救護班)’으로 종군하겠다고 나섰다. ‘구호반’이란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장병들을 돌보는 ‘간호보조원’을 뜻하지만 실체는 ‘정신대’라는 걸 어린 여학생이 어찌 알았으랴…. 또 몇몇 학생은 군대에 나가 공을 세우고 만약 전사해 ‘야스쿠니신사’에 봉안되어 부모는 유족 대우를 받을 것이라 해서 군대 쪽을 희망했다.

이 얼마나 기막힌 발상인가. 내 역사를 못 배우고 일본 것을 하향식으로 익힌 때문이다. 이 무렵 학교에선 연일 군가를 불렀다. / ‘우에노역(驛)’에서 ‘구단(九段-야스쿠니신사)’까지 / 지팡이에 의존, 진종일 걸려 / 내 아들아 내가 왔다. / 라고. 또 어느 학생은 ‘소년비행병’에 가겠다고 벼르는 바람에 桂소년도 그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오늘도 뜬다.

뜬다”라는 군가를 부르며 비행단이 있다는 ‘도쿄’만의 ‘가스미가우라(霞ケ浦)’의 꿈을 꾼 일도 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를 말렸다. “너는 군대보다 글 쓰는 쪽으로….” 이렇게 달래며 굳이 전쟁에 나가려면 종군기자 같은 게 좋을 것이라 했다. 물론 이 모두는 철없는 소년들의 희망(꿈) 사항이었다.

전황이 급해지자 일제는 소학교 졸업반 학생들을 군속(軍屬)으로 끌어갔다. 그 시절엔 소학교에 결혼한 학생도 있었다. 교장 딸 ‘하루미’는 장차 교사가 되겠다고 했고 또 어느 남학생은 ‘헌병이 되겠다’고 말하자 담임선생님이 헌병은 공부도 잘해야 하지만 애국심이 강해야 한다며 “네 놈은 안 된다!’고 면박을 준 일까지 있었다. 그 학생의 ‘헌병타령’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곡절이 숨겨져 있었다.



모시옷을 산뜻하게 차려 입고 장터에 나갔다가 순사가 검은 물감을 뿌리자(흰옷 금지) 홧김에 순사를 메다꼿은 결과 주재소에 끌려가 밤새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쇠존매(소의 성기)’로 얻어 맞고 한 달간 집에 누워 고생한 아비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당시 고문 방법은 ‘쇠존매’가 유행했는데 이 매는 살갗이 묻어나는 혹독한 형벌이었다. 일제치하의 조선인은 이런 대우를 받았다.

桂소년은 교장 딸 ‘하루미’와 가깝게 지냈으며 교장 사택에 불려가 식사를 같이 한 일도 있었다. 교장은 이런 말을 했다. ―“가츠라 (桂)군은 훌륭하다. ‘하루미’보다 일본어를 더 잘하니 둘이 가까이 지내라”라고 격려했다. 학예회 때 ‘만주아가씨(萬壽の姬)’ 발표에서 桂소년은 ‘요리토모(가마쿠라 막부-대장군)’, ‘하루미’는 ‘가라이토(唐絲)’ 역을 맡아 큰 박수를 받은 일도 있다.

한번은 ‘하루미’가 桂소년에게 추락한 미군비행사 구경을 가자는 바람에 따라 가보니 소문대로였다. 군청 앞마당에 미군 조종사가 수갑을 찬 채 겁먹은 표정으로 몸을 뒤틀며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허우대가 늘씬한 미군 조종사의 머리는 황백색에다 눈은 시퍼렇고 손등엔 송충이 털 같은 게 덮여 있다.

이를 일본헌병이 지키는 중인데 구경꾼 앞줄에는 주로 일인들이 차자하고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칙쇼(畜生)!’ 소리를 연발하며 ‘게다’ 굽을 딸각거리는가 하면 침을 뱉으며 돌팔매질도 했다. 이 조종사는 서해를 항해하는 화물선을 격침시키고는 유유히 저공비행을 하다 일본 헌병들이 쏘아 올린 총탄에 맞아 기체를 버리고 낙하산으로 탈출, 포로가 된 몸이었다. <前 중도일보 주필>
▲ 일제시대 강제징병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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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 징용자의 유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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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 징용자의 처참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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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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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황국신민의 맹서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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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대로 끌려간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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