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과학자의 경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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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과학자의 경전읽기

<사이언스칼럼>

  • 승인 2006-08-08 00:00
  • 박승남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온도광도그룹장박승남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온도광도그룹장
언제부터인지 출입국신고서에 직업을 물리학자라고 적기 시작했다. 그런 내게 종교는 과학과는 쉽게 양립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와 석가 같은 성인들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들을 때 존경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분들의 행적 중 나의 이성이 이해할 만한 사실들은 많은 감화를 주었기 때문에, 난 그 안에 숨어 있는 그분들의 인간적인 면에 더욱 가까이 가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풋내기 연구원 시절,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셨던 아버지를 여의고, 그 슬픔을 견디기 어려워 불경을 읽기 시작 했었다. 부처의 첫번째 말씀으로 알려진 수타니파타였을 것이다. 한 때 소설과 영화로 인기를 모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경구가 수록된 경전이다.

팔리어로 씌어진 불교 초기의 경전으로 사용된 용어나 내용 등으로 미루어 현재 전하는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석가의 가르침과 원시불교의 핵심을 어려운 불교 용어를 쓰지 않고 쉽게 풀어 쓴 이 경전은 나에게 많은 힘이 되어 주었을 뿐 아니라 불교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읽어가는 경전의 수가 늘어나면서 의심 또한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만을 추구한다는 자칭 물리학자의 근성 때문이었을까? 깨달음을 얻은 부처에게 무시무시한 마귀들이 나타나서 어렵게 얻은 깨달음을 설파하지 말고 혼자 즐기라고 유혹하는 장면과 이런 무서운 마귀들을 물리치는 부처를 기술하는 장면은 풋내기 과학자를 곤경에 빠트리고 만다.

어디 이 뿐이겠는가? 기존의 경전처럼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로 시작하여 마침 석가가 설한 것을 아난 존자가 읊은 것 그대로 써 내려간 형식을 취하는 여러 대승경전에는 더욱 황당한 사건들이 나타난다. 부처가 설법을 마치니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등, 천문과 우주를 주무르는 부처의 신통력이 절정에 이를 때쯤 이 교만한 과학자는 어김없이 경전을 내 동댕이치고 만다.

한 때 성경을 읽다 예수가 행하였던 기적에만 집착하다 성경을 내 동댕이 친 이후 이 가난한 중생은 영적 구제를 영원히 받을 수 없는 존재인가 보다 하며 한숨을 쉰 지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은데….

세월과 함께 연륜이 붙고, 세상을 보는 눈에 너그러움이 쌓이기 시작할 즈음 우연히 읽은 일본학자의 짧은 글이 내 머리를 후려쳤다. 경전의 표현 방법에 대한 설명이었다. 부처를 유혹하던 마귀는 부처의 마음 속 나쁜 상상이란다. 부처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기쁨이 충만한 중생들에게 하늘에서 내리는 가랑비가 또한 어찌 꽃비가 아니었겠는가? 너무 부끄러웠다. 경전을 은유와 비유가 적절히 조화된 문학작품으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여유가 없었단 말인가.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 보았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예수의 인간적인 위대함을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요한복음에는 내용이 없지만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나 되는가 가서 알아보아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5000명의 군중 속에서 제자들이 찾아온 음식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도 한 아이로부터 구한 것이었다. 과연 기적으로 5000명을 먹이고도 남았을까? 아마도 이 음식을 나누기 전 예수는 엄청난 가르침을 주셨을 것이다. 어린아이도 준비한 도시락이 어른들에겐 없었을까. 분명 어른들은 자신의 몫을 위해 음식을 숨겼을 것이다.

위대한 가르침에 감화되자 기쁨이 넘치는 군중이 스스로 내 놓기 시작한 음식과, 이웃을 배려하여 사양한 음식까지 더해지니 5000명을 족히 먹이고도 남지 않았을까? 내 나름의 해석이지만 이렇게라도 타협하고 나니 경전읽기는 이제 더 이상 날 괴롭히지 않는다. 긴 장마 후의 더위가 예사롭지 않다. 이번 휴가에는 한 때 읽다 처박아 두었던 화엄경과 대 타협을 시도하며 더위를 식혀 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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