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람 속 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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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람 속 눈발

<문화초대석>

  • 승인 2006-08-07 00:00
  • 김완하 시인김완하 시인
연일
▲ 김완하 시인
▲ 김완하 시인
찜통더위에 밤에는 열대야다. 이럴 때 차가운 겨울 밤바람 속에서 만난 눈발을 떠올려봄은 어떨까? 우리에게 매우 흔한 사실조차 상황에 따라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우리에게 겨울의 눈발이 주는 신선함도 매번 겪는 일로 치부해 버리면 그렇게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극적인 순간 새롭게 다가올 때 하나의 자연현상이라는 차원을 벗어나 생의 진한 감동과 깊은 의미를 일깨우며 큰 울림으로 다가오게 된다.

내게는 눈발을 통한 지울 수 없는 순간의 경험이 있다. 십여 년 전 2월에 나는 겨울 내장산에서 실시된 1박 2일의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정읍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도착한 내장산, 저물면서 눈이 내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밤 지하에서 세미나를 끝내고 저녁 겸 간단한 회식을 마치고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와 막 지상에 섰을 때였다.

그때 내 생의 최초로 인식될 엄청난 눈발과 마주쳤다. 그 눈발은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통째로 무너지고 있었다. 어둠 속을 휘몰아가며 거대한 군단을 이루어 계곡으로 휩쓸리는 그 눈발 속으로 양옆의 산들도 함께 무너지고 있었다.

그 경이와 충격 앞에 나는 순간적으로 길을 잃고 말았다. 한없이 계곡 사이를 걸어가며 양옆의 봉우리를 메우듯 몰려오는 눈발에 나는 깊게 취하고 말았던 것이다. 겨울바람은 사정없이 내 몸을 휩쓸어가고 눈발들은 잠시라도 눈을 떼면 새로운 세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무들은 눈을 뒤집어쓴 채로 싱싱한 몸뚱이를 드러냈다.

나는 가슴을 열어 그 눈발을 다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가슴은 열리지 않았다. 엄청난 그 눈발의 위력에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면 서래봉 위로는 떼 호랑이가 울고 가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내 어깨에도 눈이 쌓여서 나는 어깨 가득 눈을 지고 서있었다. 그렇게 한참 파묻혀 있다가 발을 옮기려면 이미 그 억센 눈발들은 뚝뚝 길을 끊어내고 있었다.

아, 그날의 서래봉 위로 눈발을 몰아오는 바람 소리 속에서 울부짖던 떼 호랑이들! 그 감격스러운 순간 속에 나는 아무 흔적도 없는 눈사태 속을 뚫고 가면서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언덕 위로 올라섰을 때였다. 눈발 속에 모든 것은 깡그리 묻혀버렸지만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서로서로 어깨를 맞대고 팔짱을 낀 채 한 몸으로 파르르 떨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산이 큰 가슴을 열어젖히더니 그 품 안으로 빈 들을 끌어들이자 이 세상 가장 먼데서 한 줄기 밝은 빛이 달려와 마을에 닿는 것이었다. 그 빛을 따라 길이 하나 와 닿았다. 내 가슴으로 아주 시원한 바람이 한 자락 지나고 있었다. 오늘, 다시 그 겨울 내장산 눈발에 한 번 더 세차게 휘말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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