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완하 시인 |
우리에게 겨울의 눈발이 주는 신선함도 매번 겪는 일로 치부해 버리면 그렇게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극적인 순간 새롭게 다가올 때 하나의 자연현상이라는 차원을 벗어나 생의 진한 감동과 깊은 의미를 일깨우며 큰 울림으로 다가오게 된다.
내게는 눈발을 통한 지울 수 없는 순간의 경험이 있다. 십여 년 전 2월에 나는 겨울 내장산에서 실시된 1박 2일의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정읍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도착한 내장산, 저물면서 눈이 내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밤 지하에서 세미나를 끝내고 저녁 겸 간단한 회식을 마치고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와 막 지상에 섰을 때였다.
그때 내 생의 최초로 인식될 엄청난 눈발과 마주쳤다. 그 눈발은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통째로 무너지고 있었다. 어둠 속을 휘몰아가며 거대한 군단을 이루어 계곡으로 휩쓸리는 그 눈발 속으로 양옆의 산들도 함께 무너지고 있었다.
그 경이와 충격 앞에 나는 순간적으로 길을 잃고 말았다. 한없이 계곡 사이를 걸어가며 양옆의 봉우리를 메우듯 몰려오는 눈발에 나는 깊게 취하고 말았던 것이다. 겨울바람은 사정없이 내 몸을 휩쓸어가고 눈발들은 잠시라도 눈을 떼면 새로운 세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무들은 눈을 뒤집어쓴 채로 싱싱한 몸뚱이를 드러냈다.
나는 가슴을 열어 그 눈발을 다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가슴은 열리지 않았다. 엄청난 그 눈발의 위력에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면 서래봉 위로는 떼 호랑이가 울고 가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내 어깨에도 눈이 쌓여서 나는 어깨 가득 눈을 지고 서있었다. 그렇게 한참 파묻혀 있다가 발을 옮기려면 이미 그 억센 눈발들은 뚝뚝 길을 끊어내고 있었다.
아, 그날의 서래봉 위로 눈발을 몰아오는 바람 소리 속에서 울부짖던 떼 호랑이들! 그 감격스러운 순간 속에 나는 아무 흔적도 없는 눈사태 속을 뚫고 가면서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언덕 위로 올라섰을 때였다. 눈발 속에 모든 것은 깡그리 묻혀버렸지만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서로서로 어깨를 맞대고 팔짱을 낀 채 한 몸으로 파르르 떨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산이 큰 가슴을 열어젖히더니 그 품 안으로 빈 들을 끌어들이자 이 세상 가장 먼데서 한 줄기 밝은 빛이 달려와 마을에 닿는 것이었다. 그 빛을 따라 길이 하나 와 닿았다. 내 가슴으로 아주 시원한 바람이 한 자락 지나고 있었다. 오늘, 다시 그 겨울 내장산 눈발에 한 번 더 세차게 휘말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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