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중겸 건양대 석좌교수 |
정치에 이용된다거나, 시민의 자유가 억압된다는 반대가 거셌다. 반세기에 걸친 논란 끝에 창설됐다. 임무는 범죄의 예방이었다. 미리 범죄와 폭동의 징후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방법은 순찰이었다. 순찰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협력이 중요했다. 어울림을 추구했다.
경찰관마다 담당구역을 정해 배치했다. 구역을 순찰하고 눈에 띄는 지점에서 근무했다. 점차 내 동네 경찰이 되었다.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든 물었다. 지역담당 경찰관이 바로 우리의 파출소인 셈이다.
미국의 대도시 경찰은 런던경시청이 모델이다. 1830년대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다. 일찌감치 미국땅을 밟은 영국인이나 프랑스인은 자리를 잡았다. 기득권층이 되었다. 뒤늦게 온 아일랜드인과 독일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살기 힘든 곳이었다. 일자리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신이민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런던처럼 제복을 입고 계급장을 단 경찰을 만들자 했다. 영국의 식민통치로 고통을 당했던 기억이 주저하게 만들었다. 연이은 폭동이 결국 1838년 보스턴 경찰을 창설케 했다. 이어 뉴욕 등에서 도입했다.
미국의 대도시에서 영국의 경찰관 같은 경찰은 찾아 볼 수 없다. 범죄와 전쟁하는 그곳에서는 기동력이 관건이다. 도보순찰 자체가 위험하다. 순찰차로 휙 지나가는 순찰이다. 범죄가 발생하면 주변의 순찰차가 대거 몰려든다. 힘을 과시한다. 소도시나 마을은 그렇지 않다.
인구 단 몇 백 명의 지역도 자치단체가 될 수 있다. 주민들이 주정부에 청원을 해서 헌장을 받으면 된다. 내 경찰을 만든다. 만 여 곳이 넘는다. 그 반이 경찰관 아홉명 이하다. 넷 중 하나는 네명 이하다. 경찰서는 다름아닌 우리의 파출소다.
도쿄. 1603년부터 일본의 수도다. 1871년 나졸 3000명을 뽑아 치안에 투입했다. 유럽의 경찰제도를 견학하고 나서 1874년 도쿄 경시청을 설치했다. 처음에는 경찰관이 주요 교차로에서 근무했다. 번(番)을 섰던 것이다. 교대로 번을 선다 하여 고방(交番)이라 했다.
그러다가 그곳에 건물을 지었다. 동이나 읍지역에서는 파출소라 했다. 면지역에서는 주재소라 했다. 주재소는 가족이 함께 근무한다. 남편인 경찰관이 순찰을 나가면 부인이 나와 일한다. 둘 다 고방이라 한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에는 고방(Koban) 즉 파출소(Police box)다.
오늘의 일본. 압제의 하수인이라는 오명은 옛말이다. 민주경찰로 재탄생했다. 자전거를 길가에 세워둔 경찰관과 주민이 얘기하는 것은 흔한 광경이다. 고방은 인생상담소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길안내는 기본이다. 노인은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린다. 차비도 빌려준다.
곁에 푸근한 경찰관과 파출소가 있다는 것은 하나의 복이다. 경찰서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다.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에게도 경찰이 필요하다. 내 곁에 우리 파출소가 있어야 한다. 싱가포르도 수입한 제도다.
2003년에 몇 개의 파출소를 하나의 지구대로 통합했다. 파출소가 사라졌다. 일본에선 파출소를 증설한 해였다. 2006년에 많은 지구대를 해체하여 파출소를 부활시켰다. 안심 거점이 다시 돌아왔다. 반갑다.
힘(力)의 경찰이 필요한 곳이 있다. 반면 어울림(和)의 경찰이 적합한 곳도 있다. 안전은 안심이 바탕이다. 안심은 느낌이 좌우한다. 파출소는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감성 치안의 산실이다. 천만금 주고서라도 내이웃 삼으려는 천만매린(千萬買隣)의 파출소 만들기는 경찰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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