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정책이든지 부작용은 있게 마련이고 그 정책 때문에 이득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사람이 갈리는 것 또한 으레 있는 일이다. 이렇듯 국민들 간에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적절히 조정해 나가면서 정부가 지향하는 국정운영의 기본방향에 맞게 각종 정책을 일관되게 수행해나가는 것이 바로 국정운영능력이다. 정부가 지향하는 국정운영의 방향에 다수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다음 선거에서 그 정부는 선택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이 대의민주주의사회의 기본 운영원리이다.
경제학에서는 각 경제주체의 행동을 ‘제약하의 최적화’라는 말로 설명한다. 쉬운 말로 하자면 소비자건 기업이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의 행동을 조직한다는 것이다. 기름값이 오르면 누가 뭐라 그러지 않아도 차를 덜 끌고 다닐 궁리를 하게 되는 법이다.
정부의 정책도 경제주체들에게는 제약조건의 하나로 작용하므로 각 경제주체는 자신에게 유리하면 유리한대로 불리하면 불리한 대로 정책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을 조정해서 최적화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정책이든 그것이 일관적이고 예측 가능하게 수행되는 한 정책 시행에 따른 부작용도 당초 예상보다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만약 정책이 일관적이지 않거나 예측 가능하지 않을 경우 경제주체들은 최적행동을 조직할 수 없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특히 정부정책이 특정 이익집단의 영향력에 의해 변경 혹은 수정될 수도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될 경우 각 경제주체들은 ‘제약하의 최적화’대신 ‘제약’자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꾸려 하는 소위 ‘지대추구적 행위’에 앞 다투어 나서게 되는데 이 경우 사회적, 경제적 혼란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증폭될 수밖에 없다.
한미 FTA 추진, 양극화 해소, 국가균형발전 등 국정의 주요 아젠다들을 놓고 빚어지고 있는 최근의 여러 논란들도 정부의 일관적이지 못한 때로는 상호모순적이기 까지 한 정책추진과정에서 초래된 것이다.
많은 국민들은 이 정부가 자유와 경쟁, 글로벌 스탠더드와 개방, 시장에 대한 신뢰로 요약되는 자유주의적 기조로 국정을 운용하려는지 아니면 분배와 균형, 조화를 중시하며 국가의 적극적 시장 개입을 도모하는 평등주의적 정책기조에 기초하고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아예 정책 철학이라는 걸 갖고 있지 않은 채 상황에 따라 즉자적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교육정책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 교육 정책의 기조는 엘리트 교육인가 아니면 평등교육인가? 대학진학률이 80%를 넘는 상황에서 왜 대학은 평준화하지 않는가? 수준 높은 대학교육을 위해 대학간 경쟁이 당연하다면 그 논리가 초중등교육에 적용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학도 산업이니까 생산성을 높이라고 채근하면서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려는 대학의 노력에는 제동을 거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이런 의문들 때문에 우리는 혼란스럽다.
교육정책이 되었건 경제정책이 되었건 또 다른 어떤 정책에서건 극좌정책보다도 극우정책보다도 더 나쁜 정책은 일관성 없고 예측 불가능한 우왕좌왕 정책이다.
그리고 독재정부보다 더 나쁜 정부는 자신의 국정운용에 자신감을 잃은, 그래서 정책의 무게를 잃어버린 허약한 정부이다. 정부는 더 이상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지 말기를 바란다. 정부정책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을 조정한 사람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사회는 합리적인 사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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