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을 흐르는 유머… 웃다가도 슬퍼
한국영화기술 한 단계 끌어올린 수작
우습다. 화가 나고 분하다가도 우습고, 슬프고 안타깝다가도 우습다. 통쾌하다가 마지막엔 처연한 슬픔이 스민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가지고 논다. 장르를 부수고 뭉뚱그려 가면서 놀고, 관객의 감정을 쥐었다 폈다하며 논다. 그 결과 재미있는 영화가 됐다.
영화가 시작되는 건 용산 미군부대 영안실이다. 다량의 포름알데히드가 버려진다.
3년 뒤, 한강 둔치에서 햇살을 즐기던 시민들은 다리에 붙은 뭔가를 발견한다. 괴물은 순식간에 둔치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딸을 데리고 도망치던 강두는 그만 손을 놓치고 만다. 딸이 죽었을 거란 생각에 슬픔에 젖은 강두. 딸에게서 전화가 오고, 가족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한강으로 향한다.
‘괴물’의 주인공은
뉴욕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킹콩이나 고질라 같은 크기와 파괴력은 없지만 얕보면 큰 코 다친다. 경사면에서 미끄러져 구르는 웃음도 주지만, 좁은 공간으로 피신한 ‘먹잇감’을 잡기 위해 입구에서 으르렁거릴 때, 해골을 뱉어낼 때는 공포의 괴물 그 자체다.
괴물의 대척점에 한 가족이 있다. 괴물이 볼거리의 주인공이라면 이야기의 중심은 가족이다. 한강 둔치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강두(송강호)와 아버지 희봉(변희봉), ‘전직 운동권’ 남일(박해일), 굼뜬 성격의 양궁선수 남주(배두나). 풀리는 일 없고 소심한 보통 사람인 이들이 딸 현서(고아성)를, 손녀를, 조카를 구하기 위해 괴물과 맞서고, 불현듯 영웅이 된다.
괴물에서 가족으로 이야기가 넘어가는 순간, 괴물 판타지는 현실로 돌아선다. 괴물과 접촉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족들은 병원에 갇히고, 강두는 정신병자로 몰린다. “제발 내 말 좀 끊지마. 왜 내 말 안 들어줘.” 강두는 절규한다.
대형 참사가 날 때마다 TV에서 본 유가족들의 진짜 모습이 그렇지 않았을까. 그들도 강두의 가족처럼 무능한 공권력에 분노하고, 사람들의 무관심에 상처받았을 거다.
못 배운 사람들이라고 무시해버리고, 절박한 상황을 도리어 이용해 먹으려 드는 참담한 ‘한국적’ 상황은 괴물을 활개치게 만들고 잡혀간 현서를 극한의 위험에 빠뜨린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왜 ‘더 호스트(The Host)’, 기생충을 키우는 숙주인지 그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강두는 사건 진상을 늘어놓는 TV를 발로 꺼버린다. 그러고선 묵묵히 밥을 먹는다. 결국 희망이란 제 몫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력에 있다는 무언의 충고다.
나사가 하나쯤 풀린 듯한 캐릭터를 생동감 있게 표현해낸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하다. 그러나 ‘괴물’은 잡다한 해설이 필요 없는 딱 봉준호표 영화다. 교향곡 전곡을 완벽하게 습득하고 능숙하게 이끄는 지휘자처럼, 배우들의 연기와 컴퓨터그래픽까지 꼼꼼하게 챙겨 자신의 뜻대로 엮어낸 세공술은 놀랍다.
봉 감독은 장르 파괴를 통해 관객들이 마음대로 느끼고 생각할 길을 활짝 열어 놓았다. 그 중 하나를 뽑자면, ‘괴물은 우리 삶 어디에고 있고, 그걸 물리칠 방법은 희봉이 강두를, 강두가 현서를, 현서가 세주를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서로를 보호하고 지키려는 마음에 있다’는 거 아닐까. 희망의 씨앗이 거기에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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