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기억의 시계를 ‘앞으로 나란히’ 구령에 줄서던 초등학교 시절로 되돌려본다. 교육위원 선거와 당선무효의 빈자리를 채우는 대전시교육감 재선거는 마치 그맘때의 줄서기를 복습하는 양상이다. 하기야 우리 교육이 언제 일사불란한 줄서기에서 시작해 수직적인 줄서기로 끝나지 않은 적 있었던가.
그 문화의식에 잠재된 현상이 교육계의 국회의원 선거라 할 교육위원 선거에 투영돼 현저히 꿈틀거릴 뿐이다. 교육감 재선거만 봐도 교육계 특유의 선후배 관계로 얽혀 초등은 공주교대, 중등은 충남대, 하는 식으로 학생과 학부모와는 멀찌감치 떨어진 채 동문 대결구도의 틀을 도무지 벗지 못하고 있다.
재선거에 재재선거(再再選擧)는 또 무슨 소리인지, 아무리 연대하며 공모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사라지만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다. 선거가 특정한 갈등을 진정시키고,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특정한 형태를 부여해서 교육 파괴를 막는다고 가정할 때, 지금의 이 선거가 과연 이런 요건에 합당하기나 할지 짙은 회의감이 밀려온다. 왠지 가을날의 참깨다발처럼 알맹이가 꽉 찬 뭔가가 없고 공허하다는 얘기다.
물론 정치와 마찬가지로 교육의 장에도 갈등이 없을 리 없다. 한정된 유권자와 제한된 선거운동, 하물며 똑같은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는 데 화기애애하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보수를 받음으로써 노동이 불유쾌한 것이라는 명백한 반증일 수도 있지만, 연봉 5000만원대의 쏠쏠한 유급제도 이뤄진 마당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기로 하자. 선거운동 기간이 짧고 후보를 적극적으로 알릴 기회가 차단된 것도 사실이다. 억지스럽지만 여기에는 덕망 있는 인사를 최소한의 ‘운동’으로 뽑자는 깊은 뜻도 담겨 있다. 교육관, 능력, 전문성, 열정은 그다지 기준이 못 되니 논외로 치고, 그렇다면 교육은 갈등의 원인일까, 그 결과일까?
결과든 원인이든 다시 ‘줄’이 된다. 단순화하려면 더 복잡한 줄이 되는 우리 교육의 자화상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한심하고 답답하게도 형식은 학부모, 교사, 지역인사로 짜여진 학운위가 뽑지만 실질은 거미줄 같은 연고주의가 춤을 춘다.
누가 누군지 가닥을 모르니 선택 폭이 좁다는 말은 달콤한 변명이다. 제도상의 맹점을 빌미로 소지역주의로, 동문으로 똘똘 뭉쳐 비교육의 극치를 현재진행형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교육계 선거니까 말이다.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은 5일밖에 안 남은 선거 과정보다 선거 이후의 4년인지 모른다. 전교조.한교조에 줄서고, 자유교조에도 줄서고, 이념대립의 장에 줄서고… 이러다 빈 껍데기만 남게 생겼다.
끝 모를 줄서기를 보고, 적절한 갈등이 조직 내에 존재해야 집단성과가 가장 높게 나타난다는 나의 갈등론 강의를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해봤다. 또한 우리가 밥 먹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빵집 주인의 호의가 아닌, 그들의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국부론’의 저자를 그만 고마워해야겠다.
이 극단성이 당연시되는 풍토로 인해 경쟁과 성과가 있는 교육을 강조하는 선진국과는 정반대의 길로 향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초등이냐 중등이냐, 교대냐 사대냐가 기준이라면 이미 선거도 아니다. 다수가 선 그 줄이 다른 줄보다 악의와 무지에 오염될 가능성이 크다면 더욱 심각해지는 경우의 수다.
앞사람 뒤통수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과도한 줄서기, 줄 세우기와 줄대기, 이런 역발상과 역주행의 개념 없는 교육을 누가 백년대계라 했던가. 다행히 간선제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내 대안은 그때 가서 다시 가다듬기로 하고, ‘옆으로 나란히’가 이 시대의 줄서기로 통용되어야 한다는 가설만 미리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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