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륜.경륜서 나오는 노인들 혜안 보배 삼아야
‘유림경로상’ 수상자들 묵묵한 효실천 큰 감동
그간 우리는 고려장(高麗葬) 이야기를 실화처럼 받아들여왔고 그것을 인본(人本)의 근간으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고려장 이야기는 효와 불가분의 관련을 갖는 것으로 예를 든다면 ‘노기실화(老棄實話)’를 근거로 재미있게 그리고 전범(典範) 교육자료로 활용해 왔다는 걸 우리는 굳이 외면할 이유가 없다. 그 중 ‘기노전설(棄老傳說)’에 이르러선 더욱 흥미를 가져다준다.
요즘, 시민들이 모여 앉는 자리에선 으레 고령자 문제와 장례문화 이야기가 화두를 장식한다. 화제가 이에 미치면 고려장(高麗葬)실체여부를 놓고 설왕설래하는 일이 허다 그 실체여부를 떠나 그것을 교육과 정치의 기본 이념으로 삼아왔다는 것을 부인할 길이 없다. 노기전설(老棄傳說)을 사실로 알고 살아온 게 우리 민족이었다.
그 이야기를 간추려 보면 칠순 노인은 내다버리라는 국법이 하도 준엄해서 자식이 아비를 등에 업고 산속에 들어가는데 등에 업힌 아비는 계속 나뭇가지를 꺾어 내린다.
아비를 산속에 버리고 돌아오던 자식이 그만 길을 잃었는데 언뜻 떠오르는 게 아비가 꺾어 내린 나뭇가지가 생각이 나 그 길을 따라 귀가했다. 이후 자식은 아비의 자식사랑에 감동, 아비를 다시 데려다 집에 숨겨놓고 극진히 모시는 중인데 성안이 발칵 뒤집혔다.
대국(중국) 사신이 고려에 와서 몇 가지 문제를 내놓고 풀어내면 그대로 돌아가고 풀지 못할 경우 금 십만 냥과 고려의 낭자(색시) 300명을 내놓으라는 억지에 나라 안은 발칵 뒤집혔다.
대국 사신이 내놓은 문제란 이러했다. 첫째, 아주 똑같은 말 두 마리를 내놓고 어느 쪽이 어미냐는 것이고 둘째, 중국사신(자신)이 보름간 체류할 것인지, 아니면 더 묵고 갈 것인가? 셋째, 큰 구슬[玉]을 내보이며 그 안엔 꼬불꼬불한 길을 뚫어놓고 그것을 실로 꿰뚫으라는 것이다.
어느 하나도 쉽게 풀 수 없는 것으로 성안은 더없이 술렁거렸다. 이때 광속에 숨어 있던 아비가 나서서 이 난제를 한꺼번에 풀어 대국사신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 노인은 첫 문제인 두 마리 말 앞에 꼴을 대주며 먼저 먹는 쪽이 새끼라 했다. 둘째, 대국사신은 얼른 귀국할 수도 있고 더 늦출 수도 있다고 답했다. 셋째 큰 구슬을 실로 꿰뚫어 보라는 문제에선 이렇게 풀었다.
개미허리에 가느다란 실을 묶어 놓고 한쪽 구멍에 꿀을 바르고 이쪽 입구로 밀어 넣자 개미가 꿀이 있는 쪽으로 기어들어 관통을 시켰다. 이에 조정에선 큰 잔치를 벌이고 상을 주며 노인예우를 크게 개선했다는 전설로 노인은 그래서 보배요, 섬겨야 할 가치가 있다는 내용인데 비슷한 이야기는 또 있다.
전자의 경우처럼 아비를 지게에 지고 산에 버리고 내려오는데 따라온 자식 놈이 그 지게를 걸머지고 있어 아비가 만류했다. 이때 아들놈은 이렇게 말했다. “이 지게를 도로 갖고 가야 다음번엔 아버지를 지고 올 게 아니냐?”는 대답에 크게 뉘우치고 노인을 다시 모셔왔다는 이야기다.
이를 두고 후세사람들은 노기전설(老棄傳說)이라 이른다. 그러나 고려장이란 우리 역사서엔 나와 있는 게 없고 일제식민지 때 그들이 지어낸 설화라는 것이다.
고려 때도 ‘충’, ‘효’를 생활화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제도가 있을 리 없고 다만 괴질(전염병)에 걸린 노인을 산중에 격리시킨 사례는 있어 이것을 일제가 악용했다는 것이다.
서구사회의 효(孝)개념과 양친(養親)하는 모양새는 어떠한가? 나라와 부족에 따라 차이가 있기 마련이지만 서양 것을 ‘알베르트 까뮈’의 ‘이방인(異邦人)’에서 엿보기로 한다. 비록 픽션(fiction)이긴 하지만…. 그는 실존주의 기수로 ‘장볼’, ‘사르트르’와 함께 한 시대 인류의 정신계를 휘어잡았던 인물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뫼르소’는 어느 날 고향의 양로원으로부터 ‘모친 사망 급래(急來)’라는 전통 문을 받자 회사 일을 대충 챙겨 놓고 장례식장엘 가보니 생모는 이미 숨을 거둔 채석고처럼 굳어 있었다.
하지만 외아들인 ‘뫼르소’는 도무지 슬픈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생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은 회사월급이 적은 탓이었고 노후는 양로원이 맡았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입관하는 걸 옆에서 남의 일처럼 지켜보며 사람이란 늙으면 죽기로 되어 있는 것을, 그러다 보니 상주가 아니라 문상객처럼 그저 어정쩡한 자세로 일관했다.
입관을 하고 영구차가 장지로 향하는데 그는 상주자리를 마다하고 따로 떨어져 가까운 길을 찾아 직행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오후엔 애인을 불러내어 수영을 즐기는 한편 정사(情事)까지 나누지만 이날 뜻하지 않게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직사광선이 바늘[針] 끝처럼 따갑게 모래사장에 내리꽂히는 통에 눈이 부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아라비안’을 권총으로 쏴죽이고는 구치소에 수감되는 운명에 놓인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죄책감도 갖지 않는다. 생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은 회사월급이 적었기 때문이고 ‘아라비안’을 쏴 죽인 것은 하등 적의(敵意)가 없는데도 “그 놈의 직사광선 때문에 눈이 부셔서….”라는 식으로 되레 의연해 하려든다.
여기서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 모두는 부조리(不條理) 탓이라는 ‘까뮈’ 특유의 의식이라고나 할런지…. 서구인의 체질은 이렇듯 동양과는 얼마간 다른 면이 있지만 우리 주변에도 ‘뫼르소’를 닮아가는 부류가 없지 않다는데 걱정을 하게 된다.
세상에는 많은 상이 있어 왔지만 경노효친상은 그리 흔치 않다. 산업화사회에 따른 ‘핵가족’, 형태가 몰고 온 여파로 전래의 윤리, 도덕 같은 건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게 현실이다. 이렇듯 미풍과 전통이 날로 퇴색해가는 와중에 계룡장학재단(이사장 이인구)의 ‘유림경로효친대상’ 제정 소식에 시민들은 환영하고 있다.
지난 14일 그 첫 번째 시상식이 유성관광호텔에서 열려 자랑스러운 수상자들의 면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 효자부문(본상)은 난치성 악성간염을 앓고 있는 부친에게 자신의 간 65%를 떼어 이식한 김정흠(47)씨가 수상을 했다. 부모를 예사로 학대하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효자라는데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결정한 인물이다.
▲ 효부상(본상) 50년간 대가족을 꾸려가기 위해 행상, 막노동을 마다않고 50년간 가정을 이끌며 101살의 시모를 봉양한 정분영(70)씨가 역시 대상을 탔다. ▲ 장한 어버이 상은 같은 지체장애(3, 4급) 오세영(71), 윤길자(63) 부부에게 돌아갔는데 이들 부부는 독거노인에게 녹영을 제공해왔으며 장애인의 복지를 위해 노력한 점이 인정되어 부부가 수상을 했다. 그리고 장애인 표상이라는 점을 높이 샀다.
▲ 효부(장려상) 임계숙(36)씨는 시조부 봉양은 물론 L 튜브 관으로 ‘경구급식’하는 시모를 극진히 모신 점이 젊은 세대의 귀감이라는 데서 상을 줬다. 이들 수상자는 본상 1000만원에 장려상은 300만원으로 이 고장에선 제일 큰 상이다.
후보자 추천은 대전시와 충남 전 지역의 각급기관, 사회단체에 의뢰했고 현지 실사는 물론 네 차례에 걸쳐 엄선한 끝에 선정된 얼굴들이다. 효와 윤리, 인본이 퇴색해가는 작금의 사회상을 지켜보며 ‘유림경로효친’상은 매우 뜻있는 사업이라 해서 시민들은 계룡장학회를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계룡장학회는 그간 갖가지 문화 사업을 추진해온 바 있는데 ‘광개토대왕비’와 ‘삼학사비’를 복제 독립기념관에 옮겼고 ‘고구려유적탐사’, 일본 속의 ‘백제유적’ 실사, ‘각급학생’과 꿈나무(체육)에 대한 장학제를 10여년 전부터 실행해 오고 있다. 그리고 현재 독도에 충무공(이순신) 동상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
‘효’란 원시적 개념으로는 본능(本能)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논리적으로 구체화시킨 것은 중국 은(殷)나라 시대로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 복사(ㅏ辭)나 금문(金文) 등에서 ‘孝’라는 글자가 자주 나오고 지명(地名)과 인명으로 사용해 왔다는 게 유림 측 주장인 듯싶다. 그것이 서주(西周)시대에 이르러 정립되었으며 특히 공자(孔子)에 와서는 그것을 우주적 원리로 가닥을 잡았다.
이 효의 관념은 한(漢)나라 때 ‘효경’으로 집약되면서 그것은 정치 그 자체라고 생각해왔다는 걸 알 수 있다. 한민족의 경우는 삼국시대부터 ‘효’를 ‘충(忠)’과 동일개념으로 파악, 정치와 접목을 했으며 예를 들어 최치원의 ‘닌랑비서문’ 원광법사의 ‘세속오계(世俗五戒)’,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도 ‘효’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
특히 신라의 국학(國學)에선 효경(孝徑)을 필수로 그것을 정치와 연결했으며 ‘화랑’이 그 영향을 받아 통일의 기반을 닦은 것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 또한 태학(太學)에서 이를 강조했고 백제도 서화를 통해 이를 통치의 요체로 삼았다는 건 당시의 흐름(사조)였다고 보아진다.
조선조에 내려오면 그것은 우주의 섭리요, 무릇 행동의 기본원리로 받아들여져 형이상학 쪽으로 뿌리를 내린다. ‘효’가 그러하다보니 열녀(烈女), ‘효부’ 이 모두를 묶어 통치의 기본으로 삼고 ‘효’의 방법(행동과 생각)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를 치세의 방편으로 삼기도 했다. 열녀(烈女)란 수절을 하고 일편단심, 몸가짐을 가질 때 ‘정여문’을 세워주고 만천하에 알리며 이를 기려온 역사성을 갖고 있다.
지금도 지방엘 가보면 ‘효자비’, ‘열녀비’, ‘정여문’이 서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열녀 이야기도 어느 고을에 가나 자주들을 수 있다. 죽어가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단지(斷指)를 했다거나 목매어 자살한 사례, 심지어 망부석(望夫石)이야기가 가슴을 울리기도 한다. 망부석하면 우리는 저 신라의 박제상(朴提上) 부인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왜(倭)나라로 건너간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화석이 되었다는 그 애절한 사연….
요즘 삼강오륜(三綱五倫)이나 ‘효’, ‘도덕’ 같은 걸 어설피 떠들다가는 주변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기 쉬운 세상이 되어 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라거나 ‘구(舊)세기 인물’, 또는 ‘골동품’, ‘해묵은 박제(剝製)’, 심지어 ‘촌놈’, ‘대꼬바리(長竹)’세대라는 식으로…. 그만큼 세상이 변한 탓에 ‘효’의 방법을 놓고도 한번쯤 생각해 볼 시점에 와 있는 게 현실이다. 지금도 부모 묘 옆에 움집을 짓고 ‘굴건제복’ 에 바깥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효자가 있다.
하지만 꼭 그래야 되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은 세상이다. 제례는 간소하게 그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돈도 벌고 출세해서 사회에 좋은 일하는 것을 ‘효’ 중의 ‘효’라 생각하는 시민은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어떻든 우리는 ‘유림효친효부 대상’을 받은 수상자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한편 앞날에 행운이 같이 하길 바란다.
간을 65%나 떼어 부친에게 바친 그런 효행은 요즘 세상에선 보기 드문 일이며 또 50년간 가난한 가계를 꾸려온 자랑스러운 얼굴들을 우리는 표상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을 제정한 계룡장학회의 발전을 기대한다.
▲ 계룡장학재단, 유림효친상 시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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