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용흠 소설가 |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나 이렇게 중력을 가진 혹성의 둥그렇게 휘어진 공간 안에 갇혀 사는 일이 얼마나 기이한 현상일까? 우리가 사는 것은 농구공 위에 붙은 딱정벌레의 신세와는 좀 다른 차원이다. 만약 딱정벌레의 몸을 구체 중심부로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을 가진 농구공이라면 같은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중력이 작용하는 원형 공간에 산다는 걸 감각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주변 사물을 눈으로 보고, 보이지 않는 세계는 상상, 추측, 가정을 통해 받아들인다. 무한히 열린 세계가 눈의 수정체를 통해 들어와 굴절해 망막에 감지되는 순간, 현상학적으로 실체를 느낀다.
하지만 실제는 안구 안 쪽 지극히 작은 망막세포에서 일어난 광학적 현상에 불과하다. 미시의 세포로 들어온 광학적 자극이 바깥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인 것이다. 마음의 작용이 더해지면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기묘한 입체를 가진 ‘클라인씨의 병’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뫼비우스의 띠가 안팎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것처럼 닫힌 공간(병의 안쪽)과 열린 공간(병의 바깥쪽)의 구분이 무색한 병(甁), 입구로 들어가면 무한 공간으로 나간 것과 같고 그 반대가 가능한 그런 사물, 함수학자의 머리에나 존재할 그 병에 대한 상상은 내게 오랜 동안 풀리지 않을 화두로 남아 있었다. 이제는 얼마만큼 내 안에서 녹아버렸다.
태극의 문양에서 나는 휘어있는 우주 공간을 상상한다. 그 안에 시공(時空)의 원리가 축약돼있는 것이라고. 두 개의 상대적인 성분이 극적으로 꼬리를 물고 있는 그림에서 상생(相生)을 향한 생명의 이치를 알 것 같다. ‘무한 천공의 시작은 무(혹은 공)요, 무의 시작은 무한 천공’이라는 생각이 모순일까? 모순이 아니라면 개인인 나와 인류사회전체를 두고 그 원리를 적용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자기응시(내관內觀)의 힘을 믿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곧잘 다른 세상을 본다. 그는 그것이 환영이건 아니건 자기 안에서 미시 혹은 거시세계를 체험한 것이리라. 비슷한 경험을 통해 내 몸이 우주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광활한 우주의 끝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달리 말하면 우주를 담아내는 것도 나요, 우주에 담기는 것도 나란 뜻이다.
그래서 클라인씨의 병은 이론에만 있는 그릇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 생각한다. 살기 부적합한 환경에 노출돼 웰빙이 화두가 되는 시대, 정보의 그물망에 갇혀 정신없이 허우적거려야 하는 바쁜 21세기. 우리는 지금 어디 서 있을까? 혹시 우리 모두가 서로의 원인이 됨과 동시에 결과가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있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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