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비어천가 제2장에는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란 문장이 있다. 이것은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뿌리는 국가를 형성하는 모든 조건을 의미하고, 작게는 개인의 의지에 준하기도 한다. 장맛비가 이어지는 와중에 비 맞은 소리같이 들릴지는 모르지만, 지금 미술인의 심정이 절실하게 담긴 구절로 받아들여진다.
대전의 문화의 중심이라면 누구나 떠올리는 구도심, 그 구도심을 거론하며 발전을 모색한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고, 과연 그 뜻을 세울 수 있을지 의문이 커지고 있다. 구도심은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미술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지금도 지역 내에 가장 많은 사설 화랑들이 자리하고 있어 그 명맥을 이어가고, 그 상징적인 의미로 문화예술의 거리가 중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중구청을 시작으로 중교 통에 이르는 화랑을 나열하자면, 30년 전통의 오원화랑과 화랑의 면모를 다지며 새 단장에 들어간 대전현대갤러리, 대전 조각가협회가 운영하며 조각품을 항시 접할 수 있는 D.S.A.갤러리, 미술교사들과 교육계 전반의 전시가 이뤄지는 대전평생학습관내 대전갤러리, 현대미술을 지속적으로 기획하는 이공갤러리와 우연갤러리, 젊은 작가들이 활발한 전시를 주도하는 S.갤러리, 이안과 병원에 개관하여 또 다른 맛을 만들어가는 갤러리이안, 등록문화재 제100호이며 옛 국립농산물 품질관리원 충청지원이 `열린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것이 갑자기 화랑협의체가 등장하여 동시에 이뤄진 모습은 아니다. 사회적인 필요충분 조건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우리 대전 미술의 역사인 것이다.
하지만 운영자체를 들여다보면 그 역사가 험난하기만 하다. 적체된 손실과 경영의 악화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중구에서는 구도심의 일정 구역에 도시 공동화(空洞化)를 막기 위한 임대 지원 서비스나 시의 대폭적인 지원 조례가 발효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실효성에 대하여 장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 와중에 사설화랑에 대한 지원은 전무한 상태다. 행정에 따라 지원이 어려운 점이 있겠지만 시민들의 출혈로 이루길 바란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미술인 개인이나 단체에 그치는 지원보다는 문화예술의 거리 내 사설화랑의 운영에 직접적인 지원 즉, 임대료 지원, 시설 개보수비 지원, 주변 안락한 환경 조성 등으로 투명한 행정과 물의 파장과 같은 시너지(synergy)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기업이나 임대인의 우월적인 행태로 대전미술의 현장이 왜곡되어지는 현실도 직시해야 한다고 본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개인의 힘으로 지켜간다는 것이 어불성설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걷고 있는 거리에 깊이 스며있는 대전의 문화다. 그 문화를 즐기는 사람만이 진정 문화예술이 숨쉬는 거리가 되는 길이기에, 뿌리는 있되 열매가 맺히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되짚어 대전 시민의 정서와 같은 문화 예술의 영원한 고향으로 자리하길 바란다. 차주에는 이어서 소견이나마 그 방안을 제시해 보겠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