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중심 백제유적 유네스코 등록운동 활발
독선적 유아주의 탈피 삼국史 함께 정리해야
무령왕 일본섬 출생설 근거는?
‘가카라’섬은 ‘큐슈 사가(佐賀)’현 ‘가라즈시(唐津市)’ 앞바다에 위치한 60여 세대 250여명이 사는 자그마한 도서다. 필자는 1970년부터 자주 일본을 내왕, 공주와 ‘기쿠스이(菊水町)’간의 자매결연과 충남도와 ‘구마모토(熊本)’현 결연에도 참여했던 관계로 일본이 낯선 나라는 아니다.
문화재탐방을 비롯 양측 의원연맹대회 취재, 한.일 학술세미나 주관 등으로 70여 차례 도일(渡日)한 탓에 서먹한 곳은 아니다. 그리고 ‘가라즈(唐津市)’와 ‘아리타(有田)’까지는 가봤으나 코앞에 있는 이 섬엔 들리질 못했다.
지난 봄 큐슈(九州) 지인(知人)으로부터 ‘가카라(加唐島)’ 섬 주민들이 ‘무령왕기념축제’를 준비 중이라며 그 내용을 우편으로 보내왔을 때 솔직히 말해 시큰둥했다. 일본은 마을마다 축제(村祭リ)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필자로선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렸던 것이다. ‘무령왕기념비’를 공동으로 세운다는 소식엔 반신반의했다.
과문의 탓인지는 몰라도 우리 역사서에 무령왕출생지가 일본 섬이라는 기록을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추적을 해보니 일본역사서 ‘고지키(古事記)’에서 이를 확인했다. 하지만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미마나(任那)일본부설’을 비롯 일본 2600년 역사에 우리의 반만년史를 편입, 왜곡하는 일본임을 아는 이상 선입견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제는 사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폭넓게 수렴, 신중하게 다뤄야 할 게 아니냐는 생각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일본 ‘고지키’를 그냥 수용할 것인가를 비전문가의 입자에서도 생각을 해 본 것이다. 만에 하나 의욕만 갖고 추진했다가 오류가 생길 경우 계룡산입구 ‘박정자’에 세운 도공 ‘이참평(李參平)기념비’처럼 시끄러울 공산이 있기 때문이다.
‘무령왕’은 어떻게 일본의 이름 없는 일개 섬에서 출생했는가에 대해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백제 ‘개로왕’이 동생 ‘곤지(昆支)’에게 왜(倭)에 갈 것(交隣)을 명하자 ‘곤지’는 형의 부인(왕비)을 달라고 청함으로 왕은 이를 윤허했다는 것이다. 왕은 여러 궁녀를 거느리기 때문에 그 중의 하나였을 가능성은 있다.
왕 출산장소로 알려진 '오비야동굴'
하지만 비(妃)에겐 이미 뱃속에 아이가 있어 만삭이었다. 왕은 ‘곤지’에게 만약 도중에 출산을 하거든 왕궁(공주)으로 모녀를 되돌려 보내라는 명령도 곁들인다.
이들이 일본으로 가던 중 ‘가라스’ 앞바다 ‘가카라섬’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게 일본 ‘고지키’의 줄거리다. ‘곤지’는 왕의 명대로 모녀를 돌려보냈으며 그 아이가 훗날 ‘무령왕’으로 등극했다는 설이다.
이 섬에는 왕의 출산장소로 알려진 ‘오비야’라는 동굴과 왕자의 몸을 씻겼다는 우물까지 있어 옛부터 ‘왕의 섬’이라 불렀다는 게 일본 측 주장이다.
왕의 또 다른 이름 ‘사마(斯麻)’는 ‘시마(島)’에서 유래한 발음이라 일인들은 말하고 있는데 이를 부인하는 쪽 이야기를 들어보자.
첫째, 왕비를 동생에게 줄(聚) 수 있는가? 둘째, 비상사태도 아닌데 만삭이 된 비를 배에 태워 바다건너로 보낸 이유는 무엇인가? 셋째, 출산하면 되돌려 보내라는 뜻은 또, 무엇인가라는 반론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명이 있을 법하다.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풍습은 서양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와 고려 때도 성행했던 것으로 일본에선 장남이 죽으면 가통을 잇는다는 뜻에서 동생이 형수를 맡는 일은 허다했다. 심지어 황실에선 근친(近親) 결혼을 예사로 행해왔으며 혈통보존이라는 명분아래 일왕 ‘히로히토’는 사촌누이와 결혼한 일까지 있다. 그러니 형수를 취했다는 건 당시로선 자연스런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또 도중(일본행)에 출산하거든 되돌려 보내라는 것은 뱃속왕자가 ‘개로왕’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친히 거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곤지’는 누구이며 몇 대왕이냐는 소박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문주(文周)왕’을 일각에선 ‘백가’에게 살해당한 ‘동성왕(東聖王)’으로 보는 눈이 있는데 이 점은 아무래도 아리송하다. 백제왕 서열을 보면 ‘개로왕’ ― ‘문주왕’ ― ‘삼근왕’ ― ‘동성왕’ ― ‘무령왕’ ― ‘성왕’으로 내려가는데 연대가 부자연스럽다.
24대 ‘동성왕’이 ‘곤지’라면 ‘무령왕’에겐 ‘부왕’에 해당하지만 ‘곤지’는 ‘개로왕’의 동생이며 ‘무령왕’이 ‘개로왕’ 아들이라고 할 때 ‘곤지’는 ‘무령왕’의 삼촌이라야 옳다. 이에 대한 재조명은 물론 백제사 전반을 재정리해야 한다는 명제는 이래서 고개를 든다.
이 점에 대해 전 부여박물관 서오선 관장도 동의하고 있다. 이밖에도 ‘비류백제’는 어떻게 되어왔고 한 때 ‘왕도’였다는 ‘위례성’은 한강 하류 쪽인가 아니면 천안지방인가 하는 점도 불가피하게 규명해야 할 과제라 하겠다.
‘가카라’ 섬에 세운 ‘무령왕기념비’는 가로 2.6m, 높이 3.6m의 화강암으로 처음 설계는 일본 측이 맡았으나 그것이 신라풍이라 해서 우리 측이 이를 물리치고 백제양식을 택해다는 건 주목할 대목이다.
이 사업을 위해 공주대 尹여헌 교수(전 공주박물관장, 공주대학원장)와 ‘무령왕릉국제네트워크협의회’ 정영일 위원장의 활약상은 짐작할만하다. 尹교수는 이에 세미나도 개최했고 석학들이 펴낸 ‘무령왕’의 생애와 백제사를 점검(종합검토) 한 끝에 결단을 내렸지만 도중에 문제점이 돌출, 애를 먹었다고 했다.
일본수상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교과서 왜곡, 설상가상으로 독도를 놓고 한.일간에 마찰을 빚는 바람에 연기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비석설계의 변경은 물론 돌을 놓고도 일본 측이 예산상의 이유를 들어 중국 돌을 들고 나왔지만 이에 맞서 이쪽에선 전북 익산(백제) 돌로 대치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정서 때문이었다.
비의 제작(조각)은 공주대 미술학과 ‘金정헌’ 교수가 맡아 가로 2.6m,세로 3.6m의 ‘무령왕릉석실’ 아치를 그대로 본 땄고 그 안에 기념비문을 새겨 넣었다. 이 기념사업 경비는 1억2000만원이 소요됐지만 이를 양측이 반반씩 부담했다.
공주대교수 주축 기념비 제작 나서
우리 측 분담금은 鄭영일 위원장이 앞장서 이 행사를 탈 없이 매듭지었다는 후문이다. 지금 공주에선 무령왕릉과 백제유적에 대한 ‘유네스코’ 등록 운동을 펼치는 중이며 앞으로 한.중.일간의 역사포럼을 설계하고 있는 소식도 들린다.
백제문화 복원과 선양은 일찍이 부여박물관 ‘洪사준’ 전 관장, 공주.부여문화원, 각급기관의 꾸준한 노력으로 오늘이 있다는 걸 모른 체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鄭재욱 원장이 이끄는 ‘공주문화원’은 전국문화원의 중심에서 백제문화선양과 홍보에 힘써온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눈은 어디까지나 진실해야하며 그것은 또 사실(史實)에 입각, 과학성을 지닐 때만이 제구실을 하게 되리라 믿는다. 작금의 정황은 어떠한가.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가 역사왜곡으로 이어지는 사태 앞에 우리 모두 한 걱정을 한다. 일본의 역사왜곡에 이어 중국까지도 ‘동북공정’ 운운하며 고구려사를 폄하(貶下)하고 있다는데 우리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역사를 보는 눈은 ‘나만이’, ‘우리 것만이’ 우월하다는 식의 독선 유아주의(唯我主義)로 갈 때 자칫 왜곡 쪽으로 빠져들기 쉽다는 것이다.
백제-일본왕실 깊은 인연
백제사를 논함에 있어 그 후예라 해서 ‘백제전능’, ‘백제유일’에 빠지면 곤란하다는 뜻이다(유아주의란 학계에선 쓰지 않는 속된 용어지만). 예를 들어 고구려가 한민족의 연원(淵源)이라며 ‘단군 묘’와 ‘기자’를 내세워 우월성을 주장하는 북한, 삼국을 통일한 신라만이 한민족의 대표성을 지닌다는 식의 자세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구실을 내세워 ‘백제’를 패망국의 잔해(殘骸)라 평하는 등의 발상은 있어 곤란하다. 백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본과는 ‘야요이’시대부터 교린, ‘아스카(飛鳥)’문화를 형성, 일본 건국의 초석을 이뤘다는 건 역사가 증언하고 있어 그 누구도 부인 못 할 일이며 일본왕실과 깊은 연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일왕 ‘아키히토’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 자신 간무(桓武 - 781~806) 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 ‘속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걸 보고 백제와의 연(緣)을 느낀다. ― 라고. 그래서 일인들도 일왕혈통이 백제계라 터놓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으며 일제강점기 부여에 ‘신궁(神宮)’을 세운 것도 부여(백제)가 일본의 모태였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할 것이 있다. 섬나라 일본에 영향을 끼친 건 백제뿐 아니라 신라, 고구려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시대별로 진출, 영향을 끼쳤다는 걸 외면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고구려가 ‘나라(奈良)’의 법륭사 건축을 주도했고, ‘담징’이 그 사찰 벽에 그린 화풍에 대해 일인들은 오늘날까지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또 있다.
일인들은 ‘아스카’의 도시설계와 그 고분 벽화가 백제인의 것이라며 발굴 당시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측은 초연한 입장에서 이를 정리했다. 도시계획을 추진한 건 백제인이었으나 고분의 벽화 ‘사신도(四神圖)’는 고구려 풍(쌍용총)이라며 치마의 선(線)이 각이 져 고구려인의 성깔을 닮았다고 규명한 일이 있다.
바꿔 말하면 백제풍은 일인들이 좋아하는 천녀의 ‘하고로모(天女の羽衣)’처럼 물결이 흐르는 듯한 부드러움과 우아함에 있다는 것이며 부처의 ‘가사’도 백제 것은 부드럽고 ‘마애삼존불’처럼 표정도 따뜻하다는 걸 지적했다. 신라도 일본과 끊임없이 교류를 했기 때문에 일본의 국보 제1호 불상(목각)을 제작했을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간결(약간 첨예성)한 부처님 표상, 한마디로 빼어난 예술품이다. 이렇듯 한민족은 ‘야요이’시대부터 섬나라 일본과 끊임없이 교류, 그들을 교화시킨 역사성을 갖고 있어 일본에겐 한반도가 젖줄(乳線)이며 대륙과 외부세계를 내다보는 창구였다.
거시적 안목의 역사인식 필요
이제 우리는 독선적 유아주의에서 벗어나 백제, 신라, 고구려 모두를 아우르는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인 것이다. 그것은 한민족의 숨결이며 발자취인 동시에 소중한 자화상(自畵像)이라 걸 잊어선 안 되겠다.
고구려가 맨 먼저 개국을 했기 때문에 형이라느니 삼국통일을 했음으로 대표성을 지녔다는 등 삼국 중 가장 뛰어난 문화를 지녔다는 식의 각기 텃세만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 우리는 현재 일본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한민족 폄하
앞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중대한 시점에 서 있다. 그토록 고구려를 외쳐온 북한이 중국을 향해 이렇다 할 저항 없이 함구하고 있는 상황 앞에 우리는 아픔을 느낀다. 그러니 거시적인 쪽으로 눈을 돌릴 때라는 생각에 젖어본다.
▲ 일본 가라스 앞바다 ‘가카라섬’에는 왕의 출산장소로 알려진 ‘오비야’라는 동굴과 왕자의 몸을 씻겼다는 우물이 있어 옛날부터 ‘왕의 섬’이라 불렀다. 사진은 무령왕 탄생 전승지 오비야우라 동굴. |
▲ 무령왕 탄생 전승지 기념비 모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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