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까지 이안갤러리 20여점 전시
흔히 미술을 ‘소통의 수단’이라고 일컫는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 지식을 언어나 표정, 몸짓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듯 미술도 그러한 역할을 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 의지, 지식과 같은 정보는 각자의 내적인 정신활동이므로 타인에게 직접 전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미술작품 역시 소통수단이므로 정보를 담은 기호로 이뤄져 있으며, 특히 기호는 대부분 영상인 경우가 많다.
결국 미술작품은 작가가 이미지라는 기호로 부호화한 어떤 정보이며 우리는 이미지를 매체로 해 작품 속의 정보를 해독하는 것.
대흥동 갤러리 이안에서 미술작품을 이미지라는 기호로 부호화한 작업들을 선보이는 ‘기호와 이미지(Sign & Image)’전이 열린다.
6일부터 29일까지 고산금, 김동유, 문성민, 엄기홍 등 작가들이 참여해 총 20여점의 작품을 선보이며, 기존의 약속이나 체계를 고의로 무시하거나 왜곡함으로써 기호에 또 다른 의미가 생겨나는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낸 독특한 경험을 제공한다.
#고산금=공들여 만든 패널에 아크릴물감을 여러 차례 꼼꼼히 바르고 마감한 위에 모조진주를 어떤 규칙에 따른 듯이 붙여 놓았다. 그 규칙은 다름 아닌 잡지나 신문 기사거나 노래가사, 시다. 한편으로는 여성의 망사 옷을 연상시키는 구멍을 만들어 놓은 직물이 있다.
여기 구멍들 또한 패널의 모조진주와 같은 역할을 한다. 작가는 기호에서 정보를 제거한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의미한 형상이고 그러한 형상의 일정한 배치가 되고 있다.
#김동유=여러 개의 작은 이미지들이 모여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과일’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접시에 사과로 보이는 과일을 가지런히 담아놓은 그림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체를 이루는 작은 이미지들은 지금도 여전히 뭇 남성들의 우상으로 남아있는 마릴린 먼로임을 알아낼 수 있다. 먼로를 확인하는 순간 그것들은 과일 무더기가 돼 있고, 과일을 보는 순간 먼로의 수많은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문성민=인터넷을 통해 비트맵이미지를 다운받아 특정 부분만을 선택하거나 확대, 혹은 가공하여 출력한 다음, 그 출력물 위에 종이를 놓고 모사해낸다.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렸을 때의 이미지는 분명 어떤 정보를 담고 있는 하나의 완결된 텍스트였지만, 그의 손을 떠난 순간부터 그것은 새로운 맥락으로의 전이와 재구성이라는 운명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무작위적으로 포착한 이미지를 다시 무작위적으로 가공하여 원본과는 전혀 다른 무엇을 제시한다.
#엄기홍=자신의 논문 가운데 일부를 출력하여 여러 겹 포갠 포맥스 판에 대고 글자에 맞춰 드릴로 구멍을 낸다. 그는 자신의 글 일부를 선택해 그 문자(기호)들을 일정한 질서를 가진 구멍으로 전환함으로써 논문 속에서 놓여있던 맥락에서 일탈시키는 것이다.
그 문자들은 저자로서의 주장이나 견해를 전달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기호로서의 문자가 아니다. 단지 원래 자신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늠케 하는 거푸집이나 주형, 혹은 허물 같은 껍데기일 뿐이다. 이렇게 작가는 스스로 자신의 논문을 조형화라는 방법을 통해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해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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