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매장.부녀자강간 자행… 독일군보다 잔학
지역출신 김좌진.이범석 청산리전투서 위업
日 침략은폐.中 동북공정 등 역사왜곡 여전
일본의 대륙 침공
오늘날, 일본은 아시아의 맹주(盟主)행세를 하며 몸 불리기에 몰두, 주변국과 영토분쟁을 일으키며 자위대를 군으로 개편, 종래의 방위개념에서 벗어나 공격체제로 무장하고 나섰다.
우리가 독도 해저탐사에 들어가자 그들도 조사하겠다며 맞불전략으로 나와 요즘 동해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그 뿐만 아니다. 러시아에 대해선 북방 섬(쿠릴열도) 반환을 요구하고 중국의 ‘조어도(釣魚島)’마저 그들 영토라며 패권야욕을 숨기지 않는다.
중.일 전쟁을 새삼스럽게 되짚는 까닭은 당시 일본 군국주의가 아시아 전역을 짓밟았던 그 악몽 때문인데 오늘의 일본은 그때와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분석하기 위해서다. 중.일전쟁은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이 불심지에 불을 댕기면서 폭발했다.
일본은 이미 6년 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바 있는데 한발 앞 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장춘(長春)’ ― ‘여순(旅順)’ 철도와 이에 따른 이권을 챙긴 뒤 ‘관동주(關東州)’까지 조차(租借), 만주는 그들의 상품시장으로 변했다. 야욕은 이에 머물지 않고 중국과 전면전을 펼친 일본군의 계략은 사뭇 치밀했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한밤중에 ‘유조구(柳條溝)’를 폭파해놓고 이를 장개석 휘하 장학량(張學良)의 소행이라 뒤집어씌우면서 전쟁을 유발했다. 만주에 괴뢰정권을 수립한 건 그때 일로 그 꼭두각시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였다.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 항의 국제연맹(UN)에 제소, ‘리턴’ 조사단이 다녀갔으나 일본은 보란 듯이 ‘만주건국’을 선포한다. 국제연맹은 그 시대 강대국 손에 좌지우지되던 때라 그것이 통하질 않았다. 열강들은 경쟁하듯 후진국을 점령, 식민지로 확장을 일삼던 약육강식(弱肉强食)시대 이야기다.
중.일 전쟁 때 일본군은 1.050.000명, 100개 사단을 투입, 만주의 대도시와 철도를 장악한데 이어 북경.천진을 점령, 그 여세를 몰아 상해?남경(당시 수도)을 장악했다. 이어 일본군이 ‘한구(漢口)’를 점령하자 장개석은 오지 ‘중경(重慶)’으로 수도를 옮기며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성사시켜 모택동을 항일전쟁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월동주(吳越同舟)에 불과했다.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한 중국군은 수도 ‘남경’을 내주자 일본군은 보란 듯이 양민 30만명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2차 대전시 독일군의 유태인학살은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모택동'도 항일전 참가
밧줄로 양민을 엮어 줄줄이 세워 놓고 기관총을 난사했을 뿐 아니라 생매장, 기름을 뿌려 산사람을 불태우고 부녀자 강간, 생사람 목 베기, 군인 담력을 키운다며 총검으로 생사람 가슴 찌르기 등 만행을 자행했다.
하지만 이 사실에 대해 일인들은 지금도 ‘중국인들의 악의에 찬 모함’이니 ‘20세기 최대의 조작사건’이라 잡아뗀다.
여기에 한 수를 더해 일본군은 당시 매우 모범적이었다고 오리발을 내민다. 보수파 가운데서도 유독 도쿄도지사 ‘이시하라(石原愼太郞)’는 대표적인 나팔수로 꼽힌다.
그는 늘 돌출발언으로 보수층을 충동이며 그들 지지 아래 장관을 거쳐 도쿄도지사에 오른 인물이기도하다. 그는 소설가답지 않게 늘 말장난을 일삼는다 해서 ‘언어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따라 다닌다. ‘태양의 계절’이라는 소설로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아쿠다가와상(芥川賞)’까지 받은 바 있는 작가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야 한다며 ‘매파’의 선봉에 서 왔다. 일인들 중에는 그를 차기 수상(首相)감이라 말하는 이가 있지만 아예 고개를 내젓는 지성층(知性層)도 적지 않다.
한.일 의원연맹 일본 측 간사 ‘우오즈미(魚住汎英)’ 참의원은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가 대전에 왔을 때 ‘이시하라’의 사람 됨됨을 묻자 ‘수상 재목은 아니고 개성이 강한 반면, 균형 감각이 모자라는 인물’이라 평했다.
중.러전쟁은 2차 대전의 서곡이었지만 그때 우리는 이미 일제식민지 치하에 놓여 중국 못지않게 탄압을 받던 시기였다. 일부 조선 지식인들은 앞을 다퉈 친일행열차(親日行列車)에 몸을 싣는 이가 속출했지만 만주, 중국본토에선 격렬하게 항일투쟁을 벌인 애국자들이 있었다. 아직도 우리는 기억한다.
학병에 나갔다가 탈출, 광복군에 합류했던 ‘장준하’, ‘김준엽’, ‘신상초‘같은 지성들의 면면을…….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은 일본군을 대파했고 홍범도와 이범석도 혁혁한 공을 세운 투사였다. 김좌진은 홍성 출신이고 이범석은 천안이 고향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김구주석이 영도했고 휘하의 윤봉길의사는 살신성인한 대표적 예가 될 것이다.
홍구공원과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일본군이 4 .29 천장절(천황의 탄신) 기념행사장에 사제폭탄을 던져 사령관 ‘시라카와(白川)’대장과 거류민단장 ‘가와바타’가 즉사하고 마즈오카(松岡洋助) 공사 등 여러 요인들이 크게 다쳤다. ‘마즈오카’는 그때 눈알 하나를 잃어 평생 안경을 쓰고 다녔고 후일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주미(駐美)대사를 맡고 있었다.
윤 의사는 현장에서 자결할 겨를도 없이 일 관헌에게 잡혀 압송, 1932년 12월 19일 일본본토 이시카와(石川) 현 가나사와(金澤)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25세의 젊은 나이였다. 윤 의사의 의거로 장개석과 우리 임시정부 사이가 더욱 가까워졌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상해 임시정부…. 지금은 건물의 숲에 가려 초라한 모습이지만 2층 청사안엔 당시의 유물과 기록들을 그대로 보존, 찾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 청사가 도시 재정비지구로 지정되어 헐릴 위기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우리는 이미 전해 듣고 있었다.
이에 李麟求(계룡장학회) 이사장은 ‘역사탐방팀’을 구성솔, 현지에 달려가 조사를 벌인 일까지 있다. 이 청사가 헐릴 경우 원형 그대로를 독립기념관에 옮기겠다며 사업에 착수한 바 있으나 아직은 관망하는 입장이다.
‘홍구’공원 입구에 세웠던 윤 의사 동상은 이제 딴 곳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엔 중국의 소설가 ‘노신(魯迅)’의 문학비가 서 있다. 중국입장에서는 윤 의사보다 노신이 더 소중할지 모른다.
노신은 중국이 떠받드는 세계적인 작가로 일찍이 일본 ‘센다이’ 의학전문을 거쳐 도쿄에서 문학수업을 했으며 서구문명(문학 · 철학)에 능통한 좌경문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동서양을 아우를 만큼 가슴 넓은 작가로 우익의 예술지상주의론자 ‘두형(杜衡)’과 개성주의의 기수 ‘임어당(林語堂)’과 한 때 크게 논쟁을 벌인 일도 있었다.
그는 번역물을 내기도 했고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처녀작 ‘광인일기’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대표작 ‘아큐정전(阿Q正傳)은 세계적 명작으로 꼽힌다. 그의 비가 윤봉길의사 동상자리를 차고 들어선 꼴이 되었지만 윤의사 기념관은 따로 세워 많은 중국인들이 찾고 있다. 윤 의사에겐 유복자 ‘윤종(尹倧)’이 있었지만 세상을 뜬지 오래다.
그는 필자의 중학교 선배였다. 해방 후 학교에서 윤봉길의사 연극을 관람하다 폭탄을 던지고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는 장면 앞에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던 기억이 새롭다. 그가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일본 교장 ‘다케다(武田全)’의 힘이었다.
일인 입장에선 역적 중의 역적 윤봉길 자식을 받아들일 입장이 못 된다. ‘다케다’ 교장은 경찰서장과 언쟁을 하며 “역적의 자식이라지만 아비 얼굴도 못 본 유복자다. 그 어린 것에 무슨 죄가 있는가?
그를 잘 가꿔 폐하의 ‘고굉지신(股肱之臣)’으로 키우는 게 교육이요!” 그렇게 해서 입학이 허락되었다는 후문이다. 다케다 교장은 해방 때 귀국, 구마모토(熊本)에서 교단을 지키다 정년을 맞았다. 그는 시인이었다.
필자는 일본에 건너가면 가끔 그 를 찾았다. ‘유키구모(行雲)’라는 서정 시인으로 유명한 그는 윤종 입학 때의 일을 회상하며 필자에게 그 내막을 들려줬다. 하지만 시인도 가고 윤종 역시 세상을 떠났으니 이젠 전설처럼 옛 이야기만 나돌 뿐이다.
중국도 역사를 왜곡한다
일본은 중.일전쟁 그 와중에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고 세계제패를 노리다 연합군의 반격에 두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처음에는 기선을 잡고 중국대륙과 태평양일대를 석권했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맞고 ‘조건 없는 항복’을 선언했다. 이때 천황은 살아있는 신이 아닌 ‘보통 인간’으로 격하하고 말았다. 천황의 ‘인간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일찍이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을 내세웠다가 홍역을 치른 東京제국대 교수 ‘미노베(美濃部達吉)’의 주장대로 오늘날 천황은 상징에 불과하다. ‘미노베’는 일찍이 말했다.―천황은 상징이며 실권은 내각에 있다―며 서구의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후 일본에선 종래의 천황맹신파와 진보파가 천황의 ‘거처(二重橋)’ 앞 광장에서 격돌, 유혈사태를 벌인 일까지 있었다. 천황은 용케도 전범에서 벗어나 ‘상징’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문제는 일본 국민들의 근성이라 하겠다.
‘맥아더’의 교육(?) 덕분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오늘의 보수파는 또 다시 군사대국(팽창주의) 쪽으로 치닫고 있어 걱정스럽다. 일본은 반성을 모르는 몰염치한 나라로 옛날 우리는 그들에게 사람답게 살아갈 예의범절(人本)과 기술, 기능, 온겆 것을 전수해왔다.
이에 반해 일본은 우리에게 틈만 생기면 예외 없이 은혜를 침략으로 보답(?)해왔다는 걸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과 36년간의 ‘일제시대’ 이밖에도 수수백번의 준동사례가 있다. 그러면 요즘 일본의 태도는 어떠한가? 과거에 대한 반성은커녕 역사왜곡, 영토분쟁(독도) 유발, 침략이 아니라 후진 조선을 개명시켰다고 되레 생색을 내려든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근대문명을 배웠고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식의 논리다.
같은 전범(2차 대전)인 독일은 그렇지 않았다. 피해 당사국에 대해 줄곧 정중히 사과를 해왔고 학교에서도 침략사실을 은폐하는 교사에겐 문책을 한다는 게 아닌가. 이를 지켜보며 우리는 역시 독일이 문화대국임을 실감하게 된다.
독도분쟁으로 한.일관계가 가뜩이나 불편한 판에 그들을 학교에서 교육칙어(敎育勅語)를 가르칠 방침이라 하니 우리는 할 말을 잊는다. 교육칙어란 군국주의를 다지기 위한 천황의 훈시문(訓示文)이다. 그것을 다시 가르치겠다는 일인들의 속셈을 우리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역사왜곡은 일본 뿐 아니라 중국도 저지르고 있다.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내세워 고구려 ‘광개토왕대비’를 우리와 격리시키는 한편 고구려가 중국변방의 한 부족이었다고 격하시키고 있는데도 북한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이처럼 ‘대륙세(大陸勢)’와 ‘해양세(海洋勢)’가 활개 치는 와중에 우리는 지정학적 고민 속에 내일을 설계하며 살아가고 있다.
▲ 김좌진 장군 |
▲ 이범석 장군 |
▲ 예산 윤봉길의사 생가 |
▲ 상해 임시정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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