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하는 사람들이 낙서에 완전히 싫증을 낼 때까지 낙서 지우기 운동을 벌인 결과, 뉴욕의 지하철에서는 어느 날인가부터 더 이상 낙서를 볼 수 없게 됐다.
그런데 이 느닷없는 낙서 지우기 운동은 그냥 단순한 환경미화 활동이 아니라 범죄심리학 이론인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을 실험적으로 적용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유리창이 깨졌는데 고치지 않고 그냥 두면 지나가던 동네사람들이 이곳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니 괜찮겠다고 여겨 다른 유리창까지 깨듯이 사소한 범죄라도 방치하면 점점 커진다는 의미였다.
이후 이 이론은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오늘날은 형사정책학이나 경영학 분야에서도 크게 각광받고 있다. 한적한 곳에 불법으로 방치한 차량의 유리창을 누군가가 깨면 지나가던 아이들이 돌을 던지고 차량 지붕에 올라가 완전히 망가뜨려 놓는 경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깨진 유리창을 보면 차주가 이 차를 포기한 것으로 생각하고 충동적으로 그걸 깨고 싶기 때문이다.
이제, 깨진 유리창 이론을 지금의 한국정치에 대입하면 어떨까? 3일 노무현 대통령이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교육부총리를 비롯한 요직에 포진시키자 야당이 코드 인사 스타일에 대해 일제히 비난을 퍼붓고 있는가 하면 여당 내에서도 반발을 하면서 갈등이 재연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국민이 정부에 결정적으로 등을 돌리게 만든 정책의 입안자들을 내각의 핵심 자리에 앉히는 데 대한 반발일 것이다. 인사권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고는 하나 대통령의 심중만이 아닌 국민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인사를 전진 배치시킨 것에 대한 이유 있는 저항으로 보인다. 선거 참패에서 보듯이 그릇된 정책이 일종의 깨진 유리창으로 비쳐질 수 있다고 본다.
더 확대해보면 실험인사, 코드인사도 일종의 깨진 유리창일 수 있다는 얘기다. 하필 여당 내에서조차 기피하는 인물을 선택한 것이 정말로 국민과 맞짱 뜨자는 오기의 발동인지, 혹여 임기 말의 고립무원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는 더 두고봐야겠지만 적어도 국정 실패에 대한 국민의 '분노'나 '절망'을 무시한 듯 보이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언젠가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이미지 선거 내지 브랜드 선거에서 승자였다고 쓴 적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상표'쯤으로 알고 쓰는 '브랜드'라는 말은 원래 소속 농장을 표시하기 위해 소에 낙인(烙印)을 찍는 일을 의미했다. 고객의 마음속에 브랜드를 각인시키려면 고객의 신뢰와 인정을 받아야 한다. 같은 이치로 참여정부가 국민 속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도 국민의 신뢰와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까짓 하나 정도는 어물쩍 넘어가도 괜찮겠지 하며 소홀히 여겼던 유리 한 장이 고객을 몽땅 달아나게 하듯이 지방행정이나 국정에 접목시켜도 결국 마찬가지일 것이다. 깨진 유리창을 버려둔 회사는 망한다는 사실, 페인트칠이 벗겨진 식당이 맛이 없다는 고정관념이 그 회사나 식당을 문닫게 할지도 모른다. 유리창이 깨지는 순간 고객은 등을 돌린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번 개각 문제로 불만족한 국민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보다 광범위하게 정부에 대한 불신을 키우게 될지 모른다. 별로 거창할 것도 없는 이론이다. 일류 회사, 일류 도시, 일류 국가가 되려면 깨진 유리창부터 갈아 끼우는 작은 습관을 길러야 한다. 작은 것이 연합하여 큰일을 이루며, 또 속담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대통령이 자신의 주변에 자신을 잘 아는 사람, 뜻 맞는 사람, 자신과 가까운 스타일의 사람을 심으려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인사권자인 대통령만이 아니라 대통령을 뽑은 국민의 뜻에도 맞아야 한다. 최종 인사권자는 국민이 아닌가. 이번 인사가 한 장의 깨진 유리창이 되어 참여정부의 인사 전반으로 확대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코드인사로 임기를 마무리해서는 안 되며, 더구나 백년지대계인 교육에는 말할 것도 없다.
하나가 깨지면 모든 것이 깨질 수 있다. 공연히 유리창을 깨지 말 것이며 깨진 유리창이 있다면 신속히 수리해야 한다. 당장 깨진 유리를 교환할 수 없다면 적어도 '수리중'이라는 안내판이라도 달아놔야 옳다. 뒤늦게 투명 테이프를 붙여 깨진 유리창을 감춰본들 그때는 이미 때가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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