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진의 충청비사]62. ‘白馬山’ 전투

[안영진의 충청비사]62. ‘白馬山’ 전투

9일간 전진·후퇴 거듭 ‘철의 삼각지’

  • 승인 2006-06-29 00:00
  • 前 중도일보 주필前 중도일보 주필
“중사님! 예~ 지금 고지에 들어 가믄 살아 몬 나옵니더”
“이눔아야! 죽어도 할 수 없지 뭐~”

‘쾅! 꽝! 쿵! 쿵크르릉!’ 쏟아붓는 포탄에 산천지가 진동
9사단 소속 필자도 전투 참가… 적군 생포해 훈장 받기도
전쟁때 입은 동상 탓 찬바람 쐬면 귓불·발가락에 물집
아직까지도 꿈속 인민군·탱크 나타나면 온몸에 식은땀



전회(前回)에 이어 또 다시 전쟁이야기로 들어간다. 한국전쟁 때 격전지하면 ‘낙동강전투’와 ‘인천상륙작전’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또, 국지전(局地戰)으로는 야산 하나를 놓고 군단(軍團)병력이 맞붙어 공방을 벌였던 ‘백마고지’ 전투가 떠오른다. 이 산은 359m의 무명고지로 대전의 ‘식장산’ 보다도 낮은 야산이었다. 아군이 이 고지를 뺏길 때 철원평야를 내줘야하고 중부전선 보급로가 끊기며 방어책을 의정부에 쳐야 한다.

그래서 이 고지를 놓고 일대 혈전이 벌어졌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9일간의 전투에서 고지의 주인이 열두 번이나 바뀌는 혈투를 벌였다. 여기에 중공군 112, 113, 114사단(38군단)이 쳐들어와 우리 9사단과 처절한 공방전 끝에 아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적은 1만여 명의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당시 9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그가 6사단장 시절 1차 북진 때 압록강(초산, 혜산진)까지 진격, 그 강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한테 진상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중공군 투입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한 과거를 갖고 있다. 그 중공군(38군)과 또 다시 백마고지에서 맞붙어 김종오 장군은 그 한을 풀었다. 9사단은 6·25가 터지며 급조한 신생사단으로 필자는 이 부대에 배속 ‘백마고지’ 전투를 치렀다.

지금은 사단마크가 ‘백마’로 월남전에서도 명성을 떨친바 있는데 그때는 아라비아숫자 ‘⑨자’를 달고 다녔다. 이 고지에 중공군은 5만5000발, 아군은 18만5000발을 쏟아 붓는 일대 화력전을 펼쳤다. 소총, 기관총, 수류탄 등 소화기 총탄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고 포탄 탄피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얼마나 퍼부었으면 이 고지가 2m 정도 낮아졌다는 풍문이 나돌았겠는가.

전투가 끝난 뒤 항공기에서 내려다보면 산 날맹이가 허옇게 벗겨져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해서 그때부터 ‘백마고지’로, 여기서 승리한 9사단을 ‘백마부대’라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전투 때 미군은 철원평야 일대에 연막탄을 터뜨려 천지가 짙은 안개에 휩싸여 몇m 앞이 보이질 않았다. ‘쾅! 꽝! 쿵! 쿵크르릉!’ 하는 적의 포탄소리와 아군이 쏟아 붓는 각종 포화, 섬광, 그리고 굉음이 뒤섞여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화산이 폭발할 때 정황이 이렇듯 요란할까? 이때 의정부 - 철원평야까지 미군 보급차량이 줄을 잇고 연막 속을 라이트를 켜고 달렸다. 전투가 벌어진지 사흘째 되던 날, 지하벙커에 낯선 장교가 권총을 빼들고 들이닥치더니 “부대가 무너지는 판에 당번이 다 뭐냐?”며 밖으로 내모는 것이었다. 나가 보니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고 눈에 핏발이 선 장교와 하사관이 계급, 성명, 소속을 확인하고는 30분 후 다시 집합하라는 것이었다.


里長출신 일등병의 눈물




4 ~5대의 트럭에는 병사들이 타고 대기 중인데 이는 증원부대인 듯 했다. 이때 30대로 보이는 일등병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걸 보고 다가가 “이눔아! 울긴 왜 울어? 병든 개처럼…” 이렇게 윽박질렀다. 그는 소매로 콧물을 훔치고 나서 이쪽을 향해 “중사님은 고향에 가족도 없능기요?” 이렇게 나왔다.

“임마! 가족 없는 놈두 봤냐?”고 되물었다. 그는 경북이 고향인데 동네 구장(里長) 일을 보다 징발 당했다고 했다. 입대 직전에 상처를 했고 지금 집에는 열두 살과 아홉 살 난 자매, 7살 된 머슴애를 두고 와 그것들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는 것이다.

“중사님! 예~ 지금 고지에 들어 가믄 살아 몬 나옵니더.”하며 또, 콧물을 훔친다. “죽어도 할 수 없지 뭐~”라고 내뱉었지만 내가 군인정신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어차피 너와 나는 죽을 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고지에서 살아나왔는지, 살아있다면 지금쯤 90고개를 바라볼 연령이다.

필자는 가끔 술에 취하면 적이 코앞에 기어오르는 산병호 속에서 어떤 생각을 했겠느냐고 거꾸로 주변에게 묻는 경우가 있다. ― 고향생각, 천만에…. 애인생각 따위는 사치에 불과하지. 아무 생각이 없는 거야!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용맹성이 모자라 그런지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 머리 속은 전구(電球) 속처럼 진공상태였다고. ―

‘창백한 병사’였다고나 할까, 솔직히 말해 필자는 쏘라면 쏘고 수류탄을 던지라면 던졌다. 그러나 조그마한 운이 따랐던 모양이다. 수색에 나갔다가 솔밭을 기어가는 중공군 병사를 발견, 덮쳐 생포를 했는데 그는 방망이 수류탄을 갖고 있었다. 옆에 있던 전우는 재빨리 몸을 낮추며 바위 뒤로 숨었다.

키가 6척은 되어 보이는 적병은 얼마나 굶주렸는지 대꼬챙이처럼 말라 있었다. 그때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솟아났을까. 적병을 끌어안고 주먹으로 눈을 찍고 콧등을 때렸는데 그는 코피를 흘리며 체념한 듯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때 적병의 가슴에 달린 기장을 쥐어뜯었다.

붉은색 바탕에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검은 글씨가 새겨진 기장(記章)이다. 풀이하면 미국에 맞서고 조선(북한)을 지원한다는 요지다. 적병을 MIP(중공군 포로심문반)에 넘기려는데 그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마야! 마야!”를 외쳤다. 그것은 ‘엄니! 어머니!’ 소리라 했다. 어떻든 필자는 ‘화랑훈장’을 받았는데 그때는 전시가 되어 약장(略章)만을 달고 다녔다. 이를 놓고 ‘쬐깐한 운’이라 한다던가.

세월이 흘러 현충일엔 시장이 상품권을 보내오고 문패 옆엔 ‘국가유공자의 집’이라는 패를 달아주며 보훈처에선 다달이 얼마간의 용돈(?)을 보내온다. 하지만 늘 미안한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그때 전사한 전우, 부상당한 군경들이 허다한데 살아남은 자의 몫도 있는가 해서….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


6·25전쟁의 전모를 소화할 재간은 없다. 그 시대 좌우익간의 유혈극, 이 전쟁의 배후(열강수뇌들의 계산), 피아(彼我)간의 인적, 물적 손실 모두를 명료하게 정리하기란 개인으로선 불가능하다. 그리고 처절했던 전쟁이야기를 반복한다 해서 그것이 곧 애국행위만은 아닐 줄로 안다. 아파도 잊는 쪽으로 미워도 용서하는 아량을 지녀야한다는 정서가 사회전반에 확산되어가고 있다.

일개 졸병으로 종군한 필자로선 전쟁의 본질이나 분단배경, 전사(戰史)를 떠들기 보단 체험했던 조그마한 토막이야기를 하는 게 어울릴 것 같아 좁히기로 한다. 필자는 총을 쏘라면 쏘고 중대장이 예광탄을 발사하면 적을 향해 수류탄을 명령대로 던졌다. 그렇게 산악지대(철원, 평강, 김화)에 배속되어 전진후퇴의 대열에 끼어 인제·철원지역, 화천·김화지구를 돌아쳤다. 세상물정 모르는 ‘창백(蒼白)’한 병사….

오늘에 와서 전쟁이란 무엇인가? 왜 싸워야 했는가를 생각해보지만 논리상으로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의 전쟁논리는 너무 생경할 뿐 아니라 복합성(복합)으로 난해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하다. 그래서 전쟁소설에서 해답을 얻으려 노력을 해본 셈이다. 예를 든다면 ‘무기여 잘 있거라’, ‘25時’, 국내작가 것으로는 ‘帆船의 길’, ‘誤發彈’, ‘廣場’, ‘D데이의 兵村’, ‘殉敎者’ 같은 소설에서 말이다.

모두 감칠맛 나는 작품들이지만 미국 작가 ‘스티븐 크레인’의 소설 ‘붉은 무공훈장(The Red Badge of Courage)’이라는 소설(일어판)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헨리’라는 지원병(병사)이 전투에 참가, 전진후퇴를 거듭하다보니 이거야말로 전쟁놀이가 아니라 피를 보는 싸움이다.

따분할 뿐 아니라 피곤해져서 짜증을 부리다 보니 적이 미워진다. 그래서 열심히 싸우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 용맹이란 제 생명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 저항이며 훈장은 무아(無我) 중에 생존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패 ― 라고.


반세기가 지나도 상처는…


우리는 아직도 일본과 ‘종군위안부’ 문제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지만 한국전쟁 때도 그와 유사한 예는 있었다. 아픈 기억이지만…. 그때 ‘종로’, ‘신당동’, ‘용산’ 등지에서 ‘국군위안소’라는 플래카드를 본 사람은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전시 전방부대에선 ‘위안대’를 가끔 불러들였다. 장병들이 티켓을 손에 쥐고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던 아픈 기억을 우리는 갖고 있다.

또 다른 일화, 김화지구에 주둔했을 때 밤중에 적의 습격을 받아 정신없이 트럭에 올라 보니 야전 백(쌀푸대자루만한)이 있어 이를 깔고 앉자 질퍽거리며 금세 물기로 바지가 흠뻑 젖는 것이 아닌가. “이건 뭐지?” 투정을 하자 운전병이 “그것이 둔(돈)이라는 거다”라며 이기죽거렸다. 돈이라니…. 돈이란 생명과 같은 것이지만 극한상황에선 이렇듯 쓸모없는 존재였다. 적과 마주보는 최전방에선 주먹밥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보니 봉급을 안 타가는 예는 허다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판에 지폐란 휴지만도 못한 경우가 있다. 또 돈을 쓸 곳이 없다. 차라리 나뭇잎이나 풀잎을 쥐어뜯어 밑을 닦는 게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그것을 모아 야전 백에 넣어 끌고 다니는 듯했다.

돈이라는 관념 때문에 버리지도 못하고 끌고 다니다 눈비를 맞아 찌걱거리는 신세가 된 경우였다. 일화는 또 있다. 부대엔 ‘영현등록반’이라는 게 있어 밥만 먹으면 하는 일이 전사자의 시체를 화장, 뼛가루와 군번, 손톱, 머리카락 몇 가닥을 함께 싸서 나무상자에 넣어 후송을 한다.

하룻밤 지지고 볶는 전투를 치르고 나면 이튿날 트럭으로 시체를 실어다 ‘영현반’으로 보내 화장을 하게 된다. 전진후퇴를 반복하다 보면 목욕과 세탁할 겨를이 없어 동내의 속에선 이(蝨)가 들끓어 휴식시간에 풀밭에 그것을 털어낸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바짓가랑이를 훌훌 털면 이가 그냥 쏟아져 나온다. 그곳을 스쳐 지나가면 농구화(군화)에 이가 허옇게 기어오른다. DDT를 배급 받는 건 전투가 소강상태에 놓일 때에 한한다. 또 다른 이야기, 휴전 후 어느 공직자와 우연히 술자리를 같이 한 일이 있는데 거나해지자 이런 말을 했다.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 할 때면 아내를 누가 밟고 넘어갔을까 하는 생각에 늘 기분이 개운치 않다는 것이다. 고향이 38선 접경인데 전쟁 때 그 마을에 중공군, 인민군, 유엔군이 번갈아 주둔, 마을 여인들이 그들의 밥도 짓고 빨래도 해대며 동원되었다는 후문인데 그녀들은 하나 같이 입을 봉하고 있다면서….

필자가 휴전을 맞은 건 1953년 7월27일 김화읍에서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하순, 두루마리 가시철망으로 그곳에 경계선을 그었다. 지금은 완충지대로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으로 변해 있지만 그때 김화에선 청포도가 알알이 익어가고 있어 이육사(陸史)의 ‘청포도’ 시를 흥얼거리며 제대 꿈을 꾸었던 기억이 스쳐간다.

하지만 휴전이 된지 53년,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상흔(傷痕)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필자가 휴전 후 집엘 가보니 한날 입대했던 친구는 전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 부모가 찾아와 ‘아이고’ 땜을 하며 통곡하는 바람에 그 후로는 그의 부모를 피해 다녔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또 한 가지, 필자는 지금도 겨울엔 모자를 눌러 써야 하고 양말은 두 개씩 겹쳐 신는다. 찬바람을 쐬면 귓불(耳)과 발가락에 물집이 생기는데 전쟁 때 동상을 입은 탓이다. 그리고 요즘은 뜸해졌지만 2~3년 전만해도 가끔 꿈에 AK소총을 멘 인민군과 탱크가 나타나 이를 피해 다니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곤 했다. 그럴 때면 온몸에 식은땀이 빗방울처럼 흐르는데 이 또한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상흔인 것이다. 어떻든 다시는 전쟁이 있어선 안 된다.
▲ 백마고지 전적 기념비
▲ 백마고지 전적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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