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을 앞둔 나도 주민들에게 그간의 수고로움에 감사하는 서한을 보내는 것으로 거의반 신변정리를 마쳤다. 돌이켜보면 2년전인 2004년 6월 보궐선거에 당선돼 대덕구청장직을 맡게 된 이래 앞만 보고 달려온 나날들이었다. 행정의 ‘행’자도 잘 모르는 나로서 정말 학습하는 심경으로 구정에 몰두했다.
낙후된 대덕을 발전시키기 위해선 우선 대덕의 현주소를 잘 알아야 하고 그 바탕 위에서 미래의 비전을 설계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강점과 약점, 기회와 위협요인을 철저히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도출된 것이 1?산업단지의 전략적 개선방안, 회덕 물류유통단지조성, 오정농수산시장의 현대화사업, 계족산 및 대청호 종합개발계획 등이었다.
그동안 구정을 이끌어오면서 가장 큰 보람으로 남는 것은 중부권 최초로 주민참여 예산제를 도입한 일이다. 1989년 브라질의 포르또알레그리라는 시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이 제도는 참여와 분권이라는 지방자치의 이념에 다가가는 획기적인 제도가 아닐 수 없다. 주민의 손으로 직접 한 해 예산을 편성하는 이 제도는 자치단체장이 갖는 고유권한인 예산편성권을 주민들에게 나눠준 격으로 대덕구사상 초유의 실험이었다.
신탄진 목상동 지역의 대표적 집단민원이었던 ‘정명재 사건’을 해결해 낸 것도 기억에 남는 일이다. 2003년 겨울부터 불거져 나온 이 사건은 법무부 산하 소년원이 가출소한 소년원생을 임시수용해 직업훈련 등을 통해 사회에 적응시키고자 하는 시설로 지어졌으나 이 지역주민들은 비행청소년들을 주택가 한복판에 수용하는 것은 자녀교육상 문제가 많다는 이유로 완공된 정명재의 개관을 완강히 반대했다.
나는 2004년 6월 보궐선거에 앞서 공약사항으로 문제의 정명재 건물을 청소년공부방으로 만들어 주민의 품에 돌려주겠다는 방안을 제시했다.당선된 뒤 정명재는 법무부와 다른 지역의 건물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구 공유재산으로 넘겨져 ‘목상의 집’이란 이름으로 지난해 말 드디어 개관했다.
법동 노점상문제를 상생의 대화로 해결한 것도 두고두고 잊지 못할 사건이다. 법동 보람아파트와 재래시장 사이 도로변에 형성된 50여개의 노점은 인근주민과 시장상인들의 대표적 민원지대였다. 지난 1994년 아파트가 들어선 이래 하나 둘 생긴 노점상은 집단화하기에 이르렀고 구청의 단속은 아랑곳하지 않는 무법지대나 다름없었다.
거리질서가 지저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노점의 난립으로 어린이나 아주머니들이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도 빈번히 발생했다. 몇해 전 구청에서 강제철거를 시도한 적이 있었으나 노점상하는 사람들이 분신을 시도하다 화상을 입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건설과장의 발상으로 추진된 이 계획은 수년간 장사해온 자리를 옮긴다는 데 대한 불안한 마음탓인지 처음엔 노점상들의 반발로 벽에 부딪히기도 했으나 결국 시장상인과 노점상 그리고 구청측의 줄기찬 협상과정속에서 합의점을 찾기에 이르렀다.
내 앞 책상에 이임사가 놓여있다. 몇군데 손질을 해보곤하다가 다시 지난간 2년을 떠올려 본다. 공천 소동을 겪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나로선 정당의 벽, 바람의 벽이 너무 높았다. 선거기간 중 삭발과 3보1배의 강행군을 벌인 일도 이젠 잔상으로 다가온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 갈때/ 보지못한 / 그꽃’
시인 고은의 ‘그 꽃’이란 짤막한 시구를 읊조리면서 내가 구청장으로 있으면서 비탈진 곳, 후미진 곳에 피어있는 ‘보지 못한 꽃’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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