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 전사자 18만명 재산피해 4천억 환 달해
낙동강 공방·백마고지 전투 등 가장 치열
대전전투서 혼신 ‘딘’소장 ‘명예시민증’ 받아
지난 6일은 현충일이었고
오는 25일은 한국전쟁 발발 56주년이 되는 날로
우리는 그래서 6월을 ‘현충의 달’이라 부른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역사에는 건망증(健忘症)이 따라다니는 모양인가’.
지난 현충일을 우리는 예의 지켜봤다.
이젠 음주가무의 금기란 옛이야기가 되었으며
일부 관공서는 국기마저 내걸지 않았다
해서 매스컴이 꼬집고 나선 일이 있다.
그런가하면 여성 봉사단체가
현충원을 찾아 헌화를 하고 비석을 정성껏
닦아내는 모습에서
‘아, 그래도 막가는 세상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해봤다.
6·25전쟁은 동족상쟁의 처절한 혈투로 시작해서 그렇게 끝이 났다. 우리들은 그 때 일을 잊을 길이 없지만 그래도 용서하며 잊어야 한다는 또 다른 명제 앞에 서 있다. 그럼 6·25는 누가 저질렀는가? 이에 대해 아직도 몇 가지 가설 같은 게 나돈다.
① 스탈린의 조정 하에 김일성이 불심지를 당겼다는 설과 ② 스탈린과 모택동이 공모, 김일성을 앞세웠다는 분석과 ③ 김일성이 사전에 모스크바, 북경을 내왕, 후원을 요청(묵인 하에) 저질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당시 스탈린은 한반도 적화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나 자칫 세계대전으로 번질 우려가 있어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건 아니라는 설이 있다. 그 다음 모택동은 어떠했는가. 3국(러·중·북한)동맹 탓에 이를 반대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앞장설 형편이 못 되었었다는 분석이다.
당시 중공은 유엔과 맞설 형편이 못 되는데다 장개석을 몰아내고 혁명을 완수한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아 여력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에 남침을 묵인해오다 유엔군이 북상 압록강, 두만강 경계까지 반격하며 ‘맥아더’의 만주폭격설이 나돌자 자위책에서 100만 대군을 투입했다는 논리다. 남침은 그래서 김일성의 치밀한 계획 아래 소, 중 묵인 아래 저질렀다는 게 정답이라 하겠다.
당시 한국군은 보병 8개 사단에 중화기라고는 80㎜ 박격포, 기관총이 고작이었으며 항공기라고는 연습기 10여대뿐, 탱크 한 대가 없었다. 거기에 남한사회는 좌우익으로 대립, 혼란이 극에 달했고 남로당의 준동, 지리산의 게릴라 출몰 등 남침을 하면 민중봉기로 쉽게 점령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사흘 만에 서울점령
56년 전 그날은 공교롭게 일요일이었다. 그날
이 전쟁은 38선에서 시작 대구, 부산을 제외하고 압록강과 섬진강, 낙동강지역에서 전진후퇴를 반복하며 3년 이상을 끌었다. 큰 전투로선 낙동강공방, 포항전투, 인천상륙작전, 대전전투, 저격능선혈전, 가장 치열했던 백마고지(白馬高地) 전투를 꼽을 수 있다.
3년여의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그 피해상황을 대략(大略)적으로 보면 ▲한국군과 유엔군 전사자는 18만명 ▲부상자 40만명 ▲남한의 민간 피해자 약 100만명(납북포함) ▲인민군 전사자 52만명 ▲중공군 90만명(사상) ▲북한에서 남하한 피란민은 300만명(북한인구 1200만중)으로 1000만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반면, 사변 중 남쪽에선 의용군과 자진월북자는 29만명이라 했다.
한국의 재산피해는 물경 4100억 환으로 추산한다(당시 기준). 휴전을 맞이한 건 1953년 7월 27일로 경계선을 놓고 북측은 38선 원점을 주장한데 반해 유엔 측은 현 위치를 고집, 오늘의 철조망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6·25전쟁 이모저모를 열거할 재간이 없으므로 이 고장 대전전투만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려 한다.
大田전투와 ‘딘’소장
인민군이 한강을 도하, 수원을 점령하자 아군은 오산에 방어선을 구축, 미 24사단이 급파되었으나 여기서 또 밀리자 천안을 내주고 금강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천안을 점령한 인민군은 세 갈래로 나눠 대전 공략부대와 중앙선 점령부대, 서부를 우회공략, 호남지역을 거쳐 서남쪽에서 부산을 공격한다는 전략이었다.
적 4사단은 공주, 논산을 점령, 서북방에서 대전을 겨냥, 금강을 도하(대평리)했다. 적의 주력부대는 3, 4사단(2개 사단)으로 이에 맞서 미 24사단은 7월 14일, 공주전선이 무너지자 34연대와 대평리에 주둔한 19연대를 대전으로 철수시킨 뒤 영동으로 후송, 재편을 서둘렀다.
그리고 21연대를 옥천에 배치, 적군의 동북방 우회를 막으려 했고 미 24사단, 포병 4개 대대를 1개 대대로 재편, 대전비행장(지금의 둔산동)에 배치했다. 이때 금강을 건너온 인민군은 갑천(甲川)을 낀 구봉산에 침투, 대전 시내를 향해 포격을 가해왔다.
이렇듯 적의 3, 4 사단과 미 24사단은 정면으로 격돌, 이 전투에서 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미 스미스대대는 전멸한 뒤였으며 대전은 완전히 포위당한 채 시가전이 벌어졌다. 이에 ‘딘’ 사단장 자신도 사병 틈에 끼어 신형 ‘로켓포’를 직접 발사, 적의 탱크를 파괴하는 용맹성을 드러냈다. 사단장이 선봉에 서서 총포를 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7월 20일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대전을 사수하라!’는 미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의 엄명을 ‘딘’ 소장은 지켜낸 셈이다. 아니 하루를 더 버텼다.
그 바람에 미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은 것이다. 하루만 앞당겨 후퇴했더라면 그와 같은 병력 손실은 없었을 것이라 말하는 이가 있지만 그것은 결과론에 불과하다. 어떻든 ‘딘’ 소장이 이끄는 24사단은 이 전투에서 1만6000명 병력 중 절반선인 8000명의 손실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딘’ 소장 자신도 치욕스런 ‘포로’ 신세가 되어버렸다.
포로교환 때 본국으로
6·25전쟁에서 한국장성이 포로가 된 예는 없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그런 의미에선 ‘딘’ 소장은 더 없이 불행한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한국입장에선 그가 고마운 친구로 오늘에까지 모두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 포로가 되었는가. 그는 상부명령대로 20일에서 하루를 더 버틴 끝에 휘하부대의 후퇴를 명한 뒤 떠나는 걸 확인하고 나서 자신도 후퇴의 길에 나섰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가? 경부선 도로로 간다는 게 엉뚱하게 호남선 쪽으로 빠졌다. 부관과 운전병이 얼떨김에 착각을 일으킨 것으로 짐작된다. 금산 쪽으로 달리다 보니 이미 그쪽에 인민군이 들어와 있다는 정보에 차를 버리고 부관 등 17명의 낙오병과 함께 산으로 잠입했다.
일각에선 그가 잡힌 장소를 만인산 머들령 고개 너머 금산 입구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금산군 불이면(不二面) 어느 농가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금산과 전북 경계 산속을 36일간이나 헤매다 전북 진안군 민가에 잠입했다, 주민의 신고로 포로가 된 것이다.
그때 ‘딘’ 소장은 혼자였다. 어떻게 돼서 혼자였는가. 도중 차를 버리고 잔류 병사와 산속으로 들어갔지만 밤중에 부상병이 물을 달라 보채는 통에 손수 수통을 들고 계곡으로 물을 뜨러갔다. 여기서 어둠 속에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에 곤두박질 실신을 했다는 것이다.
다음날 부관이 산속을 헤매며 찾았으나 뜻을 못 이루고 그들은 산을 타고 남하 본대로 귀환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딘’ 소장은 수십 일간 산속을 헤맨 끝에 민가에 잠입했다가 포로가 되는 기구한 운명을 맞이했다.
대전 전투에서 실종된 ‘딘’ 소장은 3년간 인민군 포로수용소에서 억류되었다가 포로교환 때 풀려났다. 그때 미 국민들은 크게 환영, 영웅대접을 하자 일각에선 미 국민의 정서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포로를 영웅대접하다니…. 포로가 되었던 장성에게 훈장을 준데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여론이었다. 하지만 이는 잘못알고 하는 말이다.
훈장수여는 그가 실종된 직후 전쟁 와중에서 생사조차 모를 때 이뤄진 행사였다. 인민군은 그가 포로라는 걸 1년 이상을 숨기고 있었다. 대전 전투 때 그가 최 일선에서 사병들 틈에 끼어 ‘로켓포’로 적의 전차를 파괴하고 적병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는 등 그 용맹성을 매스컴이 떠들어대자 트루먼 대통령이 훈장을 수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귀환 후 그에겐 일계급 특진이라는 영예도 따랐다. 당시는 전사(戰死)로 추정한 듯 하며 또 다른 측면에선 그를 전쟁영웅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너진 24사단의 명예와 군의 사기, ‘대국민 선무’라는 전략차원에서 취해진 조치라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1월 ‘딘’ 소장 가족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위로를 하며 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니 그 후 훈장을 되돌릴(회수)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포로교환 제 1호로 풀려나 송환되었을 때도 영웅대접을 한 건 ① ‘대전 사수’ 명령을 오차 없이 지켰다는 점과 ② 사단장이 최 일선에서 싸웠다는 점, ③ 포로가 된 후에도 군 기밀을 누설하지 않았으며 장성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산 때문이다.
하지만 ‘딘’ 소장은 그 후 파티에 초청받을 때마다 도에 넘는 찬사 앞에 몸을 낮췄다는 것이다. ― 저는 영웅이 아닙니다. 한국전의 영웅은 나를 제외한 모든 군인들입니다. 저는 그때 적의 포로가 되었던 부끄러운 지휘관일 뿐입니다 ― 라고.
그가 자신을 아는 겸손한 군인이었다는데에 그를 좋아하는 이가 많았으며 그래서 지난 60년대 대전시에선 시민의 날에 그에게 ‘대전시 명예시민증’을 보낸바 있었다. 한국인, 특히 대전 시민 입장에서는 그가 영원한 친구로 기억될 것이다. 이렇듯 미군의 수난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미국을 혈맹으로 또는 형제국으로 여기며 오늘에 이른다.
전쟁이 남긴 것
6·25전쟁으로 우리 국토는 ‘쑥대밭’으로 변했으며 특히 북한은 미 공군의 폭격을 맞아 성한 구석이 없었다. 그럼 전쟁이 북측에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인가. 휴전 후 김일성 일인독재를 더욱 공고히 하며 남로당(박헌영)에게 패전책임을 뒤집어 씌워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가했다.
그것은 1953년 8월 일로 남로당 핵심간부들에게 ‘미 제국주의 고용간첩’이라는 멍에를 씌우며 정적을 숙청했다. 그 중에는 정치인이 아닌 임화(林和) 같은 월북시인까지 포함, 남로당 계파를 지속적으로 처형했다.
이를 계기로 북한주민들 사이에는 ‘반미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 잡았고 북한이 밀릴 때 도와준 중국과는 더욱 우호를 다지는 계기를 가져왔다.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깃발을 들고 100만명의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나왔을 때 필자도 그들과 총대를 겨누며 싸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반면 6·25가 우리에게 안겨다 준 것은 무엇인가. 정치적으로는 반공적 국민의식의 강화와 국가질서를 확립하는 계기로, 공산당은 천인공노할 집단이라 매도하며 친미 쪽으로 정서가 기울었다. 그 바람에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전반이 미식(美式)으로 치달았고 ‘시장원리’, ‘의회제도’ 전반이 그 궤(軌)에 있어 닮아있는 상황이다.
그럼 남북관계는 어느 선까지 와 있는가. 우리의 평화정책으로 얼마간 숨통이 트였다고는 하나 아직도 상호불신의 골은 깊다. 또 국민들 사이에는 ‘너무 퍼다 주는 게 아닌가?’, 또는 대북정책을 놓고 ‘투명성을 보장하라’는 소리가 드높다. 그러니 대북정책에 관한한 각별한 연구와 지혜가 있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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