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아쉬운 점 가운데 하나가 소신 있는 행동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공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일반 소시민들에 이르기까지 소신 있는 행동보다는 상황과 처지에 의해서 좌우되고, 여론과 대세(大勢)에 편승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고 있다. 엄격해야 할 법 집행에 있어서도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 ‘국민의 법 감정’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사건이라도 어떤 사람은 구속되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자주 있어왔던 것이다. 좋게 말하면, 상황과 사람들의 뜻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고무줄 잣대’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종교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원리와 믿음에 입각한 소신 있게 행동하는 모습보다, 시대적인 조류에 부합하고, 사람들의 편의에 맞게 변형되어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은 죄악에 빠져서 회개해야 할 백성들을 향하여,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지 않은 채, 오히려 평안과 축복만을 말하였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은 ‘쓴 말’보다는 ‘단 말’이기 때문이었다.
나라의 결말은 비참했다. 바벨로니아의 침공으로 나라는 멸망했고(BC 587), 왕이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했고, 왕은 두 눈이 뽑혀 포로로 끌려갔으며, 왕국은 초토화 되어 황무지가 되어버렸다. 역사에서 바라볼 수 있는 교훈이다.
논어에 보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는데, ‘지나친 것은 오히려 모자란 것과 같다’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지금 지나치게 다수의 목소리에 집착하고 있으며, 소신 있는 행동이 결여되어 있다. 이것은 개인적인 위기와 국가적인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태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신앙적인 의미에서 이 죽음은 거룩한 것이지만, 당시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측면에서 예수의 죽음은 예수를 시기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계략과 대중선동, 그리고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의 소신 없는 행동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백성을 선동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게 했으며, 예수를 심문하여 아무 죄를 찾을 수 없었던 빌라도는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던 것이다.
얼마 전 방송을 마친 ‘불멸의 이순신’은 많은 감동을 주었다.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드라마에 나온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감동을 주고,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린 것은 왜 일까? 열악한 조건 속에서 23전 23승이라는 승리를 남긴 그의 화려한 전승기록 때문이 아닐 것이다.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순수한 마음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맡겨준 소임을 소신 있게 감당하였던 그의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늘과 백성을 향하여 부끄러움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소신 있게 행동하며 올곧게 자신의 길을 가는 그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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