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계·환수위 노력 덕분… 도쿄대 ‘기증’형식은 오점
몽유도원도 등 日·美·佛·英 소재 도난문화재 7만5천점
1982년 필자 프랑스 예술국장 만나 문제제기 하기도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울안에 유폐(幽閉)되었던 ‘북관대첩비’를 환수한데 이어 이번엔 ‘조선왕조실록’이 돌아왔다. 이 실록은 그간 불교계와 환수위(還收委)의 노력의 대가라 보아 그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이 도서는 분량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500년 조선왕조의 발자취 그자체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적인 문화재이기도 하다.
이것을 일제 초대총독 데라우치(寺內)가 3600권을 반출, 동경제대(東京帝大)에 소장했다가 간토(關東) 대지진을 만나 대부분 불타버렸다. 그때 건진 것은 겨우 74책뿐 그중 27책을 경성제대(城大)에 넘겨줘 ‘규장각’에 보존해 왔고 나머지 47책을 이번에 환수했다.
하지만, 이를 환수하는 과정에서 명분과 절차에 문제가 있다 해서 논란이 뒤따랐다. 도쿄대 측은 실록을 돌려주며 기증(寄贈)이라고 애써 토를 달았다. 그러나 국민여론은 그것은 환수(還收)일뿐 어째서 기증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한 이야기다. 혹자는 일본 극우세력이 설치는 판에 그나마 도쿄대의 용기 있는 결단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동경대의 양심적 결단이 아니라 우리 불교계와 ‘환수위’의 압력 때문이라 보는 게 옳다.
도쿄대는 궁여지책(환수불가피)에서 잔꾀를 부린 셈이다. 그것은 ‘미리 계산된 명분 찾기’에 지나지 않으며 지난날 ‘한·일 국교’ 타결과정과 닮은 데가 있다는 여론이다. 한·일수교 타결 때 우리가 8억달러를 받은 걸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손에 쥔 건 겨우 3억 달러뿐, 나머지 차관 5억은 유상이기 때문에 갚아야 할 돈이었다. 그때 일본은 고두사죄(叩頭謝罪)는커녕 오미마이(ぉ見舞い-인사치레) 형식을 취하며 거들먹거렸다. 그 바람에 ‘졸속’, ‘굴욕외교’였다고 오늘에까지 지탄을 받는다.
징병, 징용, 위안부의 몸값과 36년간 수탈해간 피해액이 겨우 ‘3억’이냐고 흥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군사정권에선 그것을 종자돈 삼아 ‘경부고속도로’를 뚫고 중공업을 일으켰다고 내세우지만….
요즘 국민들 가운데는 문화재 환수문제를 놓고 정부의 소극적 태도를 지탄하는 이가 있지만 이 점을 생각해야 한다. ‘한·일 국교’ 타결 당시 보상, 차관 등 8억 달러를 주며 뒷말을 않기로 합의한 탓에 재론이 쉽지 않다는 걸 아는 이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정부차원의 정공법보다 딴 전략을 내세우자는 의견이 있다.
‘외규장각’ 문서는 프랑스에
우리가 도난당한 문화재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것은 물경 7만4400여점인데 이는 밖으로 드러난 수치 일뿐 개인이 소장했거나 은닉한 것까지 합친다면 더욱 많을 것이다. 나라별로는 일본이 단연 선두로 3만4000여점, 미국에는 1만7000여점, 영국에는 6600여점, 프랑스는 2100여점을 갖고 있다.
이중에는 수집애호가를 비롯, 화상(畵商)과 뒷거래 한 것도 섞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임진왜란’과 36년 식민통치시대 약탈해간 것들이고 프랑스는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강화도에서, 미국과 영국은 주로 6·25전쟁 시 가져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문화재는 한민족 고유의 것으로 그것은 우리의 자존이요, 피골(皮骨)인 동시에 겨레의 초상(肖像)에 다름 아니다. 이 중 프랑스의 직지(直指), 원본과 ‘외규장각’ 문서를 비롯, 일본에 있는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挑源圖)’는 세계가 주목하는 소중한 문화재들이다.
외규장각 도서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가 불타버렸고 나머지 340점은 탈취해갔으며 그간 반환교섭을 벌여왔지만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94년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그것을 반환하겠다고 구두약속을 한 일이 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고속전철(TGV) 모델을 우리가 사들일 때 반환약속을 해놓고 TGV만 챙기고 문화재는 끝내 돌려보내지 않았다.
‘미테랑’의 외교행각은 이렇듯 교활했다. 그 후에는 태도를 바꿔 규장각 문서와 맞먹는 문화재와 맞바꾸자고 제안해온 일까지 있다. 엊그제 ‘한명숙’ 총리가 그곳에 건너가 ‘시라크’ 대통령과 회담, 반환을 요구했으나 ‘연구해보겠다.’는 식의 어정쩡한 태도로 나왔다. 차선책으로 서울에서 그 문화재의 정기, 장기전시를 갖자는 말을 듣고 한총리는 귀국했다. 이 규장각 도서에 관해선 필자에게도 머리 한 구석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1982년으로 기억한다. 파리 취재에 나섰다가 내친 김에 ‘시라크’를 만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시라크’는 대통령이 아니라 당시 파리 시장이었다. 그래서 파리시장보다 문화성 ‘예술국장’이 좋을 듯싶어 ‘안토니오즈’와 만나 그 문제를 꺼냈다.
예상대로 그는 손을 내저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필자의 객기(?)였다. 언론인은 해결사가 아니지만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런 속성을 갖는다. 귀국 후 서울 서소문 소재 주한 프랑스 대사 ‘앙드레베앙’을 찾았으나 그는 더욱 굳은 표정으로 인터뷰 자체를 꺼렸다.
굳이 원한다면 질문요지를 받아 선별하겠다는 말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뛰어들었다. ‘그래도 혹시?’ 하는 생각에 그 문제를 꺼냈다가 되레 신경질적인 반응을 들어야 했다. ‘정부차원의 민감한 문제로서…’ 대사는 매섭게 잘랐다. 그때는 공교롭게 ‘동백림사건’ 여파로 두 나라가 신경전을 벌일 때였다.
‘한민족 畵聖’ 安堅 서산 출생
저 유명한 ‘몽유도원도’는 가로 123.2cm, 세로 31.7cm의 두루마리 비단화폭에 그려진 산수화로 이 그림이 어떻게 일본 덴리대(天理大)에 소장하게 되었는지, 유출(약탈)경위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누군가는 한 때 소장했던 사람이 ‘가고지마 시마즈(島津久徵)’라 해서 ‘임진란’ 때 선봉에 섰던 적장 ‘시마즈’영주의 후예가 아닐까 추정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와 달리 성이 같다 해서 혈통이 같은 건 아니다. 부모자식 간에도 성이 다른 예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다. 이 그림은 임진란 때가 아니라 일제시대 서울 인사동 ‘서화점’ 거래설이 유력한 모양이다.
그 근거로 1900년 그 이전, 일본본토에선 소장자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도 그런 추정을 가능케 한다. 그럼 이 그림의 작가는 누구인가. 그는 조선조 초기 인물로, 출생지는 놀랍게도 이 고장,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 출신이다. 그의 출생지엔 현재 기념관을 건립, 그 안에 ‘적벽도’, ‘소상팔경도’ 등 18점(복사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안견은 신라의 ‘솔거’, 고구려의 ‘이녕’과 함께 한민족의 3대 화성(畵聖)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초기에는 중국의 화풍을 따랐으나 나중에는 온갖 화풍을 종합 ‘안견화풍’을 창출해 낸 화가였다. 이렇듯 충남에선 겨레의 위대한 화성(畵聖)을 배출한 것이다.
그럼 ‘몽유도원도’는 어떤 그림인가. 왼쪽 화면에는 인간이 사는 세속을, 오른쪽에는 인간의 이상세계(utopia)라 할 도원경(桃源境)을, 그리고 오른쪽 바위산은 도원으로 가는 가파른 과정을 오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세속사회는 낮게, 환상세계는 도원경을 중심으로 한층 드높게 원급법의 시각적 효과를 기막히게 조화시킨 그림이다.
한정된 화폭에 현실세계와 환상의 세계를 대조시키며 자연의 위대성을 절묘하게 담은 이 작품을 그리게 된 이면엔 기막힌 일화까지 뒤따르고 있다. 안견은 세종시대부터 살아온 인물로 전례 없이 정4품 벼슬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화가로선 6품이 최상인데도 그는 안평(安平)대군의 총애에 힘입어 그토록 출세가도를 달렸는데 안평은 서화(書畵)를 좋아해서 중국 화첩(畵帖)이나 화구(畵具)를 안견에게 선물하는 등 각별한 배려로 그는 일찍이 중국화풍을 섭렵, 끝내는 조선적(동양화) 화풍을 집대성하기에 이른다. 그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명에 따라 사흘 만에 그려낸 것으로 안평의 꿈 이야기를 그대로 담은 작품이라 했다.
세종29년(1447년) 안평은 평소 들어온 ‘도화원기(중국 동진(東晋)의 고사)’를 꿈속에서 유람한 것이다. 꿈에서도 측근인 ‘박팽년’ 등과 그 환상의 세계를 체험, 그의 명에 따라 안견은 그대로 그려냈다. 이 그림에 문신들이 감탄, 찬사가 잇따랐는데 그 ‘찬시’는 그 시대 선비들의 품격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금 일본엔 4만수천 점의 우리 문화재가 있지만 그것은 표면에 드러난 것일 뿐 개인 소장, 은닉 분까지 합치면 천문학적 숫자가 되리라 는 것이다. 일제의 약탈이 어느 정도인가를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저며 든다. 필자는 1970년대 오카야마(岡山) 국립공원(조경식)에서 우리의 ‘맷돌’ 앞에 넋을 잃고 바라본 일이 있다. ‘하루방’ 석질의 맷돌…. 맷돌까지 약탈해 간 그들이고 보면 문화재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문화재 되찾기 연합
시대사조는 변하고 있다. 요즘 선진국이라는 미, 영, 불, 일본의 박물관은 문화재반환 요구가 잦아 경계의 눈을 번쩍이는 듯하다. 박물관하면 브리시티(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미국의 ‘역사박물관’, 일본 ‘도쿄박물관’ 등이 긴장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문화재 ‘피탈국’들의 반환요구가 거세지며 반환소송까지 제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번 ‘용산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했던 프랑스의 어느 관료(석학)가 한말은 우리에게 저항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약탈이 아니라 알뜰하게 보호 중이라는 가시 돋친 말을 거침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듣기에 따라선 “왜 제 것을 못 지켰느냐?”는 뜻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강자의 논리요, 약탈자의 변명일 뿐 설득력이 없다. 문화재는 원적(原籍)을 찾아 제자리에 놓여야 하며 앞으로 약탈자의 논리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는 미 로스앤젤레스 박물관을 상대로 문화재 반환소송을 낸 바 있고 이집트는 ‘피탈국’간의 연합을 호소하며 그리스, 인도 등과 협의체를 구성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영박물관’이나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도쿄박물관’엘 가보면 그것은 약탈문화재가 주류를 이룬다.
저 유명한 대영박물관에는 식민지에서 수탈해간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는 한국의 ‘미투리’까지 전시하고 있다. 문화재 환수를 놓고 더욱 눈길을 끄는 건 요즘 중국의 행보라 하겠다. 그들은 일본이 갖고 있는 발해의 ‘홍려정비’와 ‘발해석비’ 반환을 요구하고 있어 우리를 자극한다.
중국인들은 이미 옛 만주 땅 ‘집안(集鞍)’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마저 중국역사의 일부라며 격리(동북공정, 미명아래)시키더니 발해유물까지 내놓으라고 일본을 압박한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들고 나와 1500년 고구려를 옛 중국의 지방정권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그들은 앞으로 이를 대북(북한)압력 카드로 이용할 것이라는데 우리의 대응책이 시급한 상황이다. 이와 같은 풍도(風濤)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케 한다. 혹자는 문화재청을 나무라지만 그것이 어디 일개담당부서에게 전반의 책임을 떠넘길 사안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1995~2000년까지 5.600여점의 동산문화재가 도난당했다는 설이 있지만 주무관서의 인력부족과 열악한 예산을 감안한다면 질책만으로 해결될 사업은 아니다. 21세기를 정보문화의 계절이라 한다면 구석구석 챙기고 지키는 그런 배려가 절실한 계절임을 절감한다.
▲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반출해 야스쿠니신사에 보관했던 북관대첩비는 지난해 10월 환국했으며 지난 3월 북한으로 넘겨져 제자리에 복원됐다. |
▲ 조선왕조실록 중 성종·중종·세종실록의 표지. |
▲ 국보 151호이자 유네스코 등록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총 1893권 888책)은 임진왜란 이후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 강화도 사고 등 4곳에 20세기 초까지 분산ㆍ보관돼 왔으며 이 중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초대 조선총독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사진은 반출된 사고본이 보관됐던 오대산 사고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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