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관점에서는 시는 바다 위에 뜬 하나의 섬이며 부표이지. 시인의 욕망과 꿈이 긴 어둠 속을 항해하다가 육지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 내는 신기루 혹은 어떤 좌표이지. 그 섬은 남해 위도처럼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사람들로 넘치는 명소가 있는가 하면 이어도처럼 죽어야만 갈 수 있는 섬도 있지.
위도야 한번 갔다 오면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언제나 환상으로만 존재하는 이어도는 끝없는 갈망을 만들어내지…. 한번도 실제로 본적이 없는 내면의 애니마(Anima) 여신처럼… 그래서 시는 독자의 수준이 만드는 수평선으로부터 멀고 아스라할수록 좋고 그 섬이 대양의 꿈과 욕망이 띄운 부표임을 알게 하는 인식의 시가 좋은데…. 말이야 쉽지….평생에 이런 시 한편을 쓸 수 있다면 행복한 시인이지…. 이런 시를 쓸 수 없어서 시인은 불행한데 높이 뛰기 선수처럼 평생토록 행복을 연습하면 기록이 높아지는 만큼 행복도 높아질까. 아니면 불행한 연습이 축적이 되어서 고뇌가 깊어질까?
죽음이 삶의 신비이듯이 수평 아래에 있는 바다의 어둠이 시의 신비이지. 인식이 얕은 시인들은 수평너머의 풍경에 대한 동경이나 낭만으로 시를 그리지. 그 그림들은 이발소 그림처럼 혹은 남해 위도처럼 한번 보면 다시 볼 일이 없지.
인식의 저 바닥까지 가려는 시인은 좋은 장비의 잠수복을 준비하고 심장과 몸이 허락하는 곳까지 어둠으로 내려가지. 그 잠수의 깊이가 욕망과 환상의 깊이 이라네. 감정과 사유의 파도에 뜬 부표로서의 섬, 한 마리 갈매기처럼 앉아 있는 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지. 아무렴 많다 뿐인가. 하늘을 찌를 듯 고층빌딩이 올라가고 산더미 같은 상품이 공장에서 생산되어서 바다는 화물선으로 가득하니 욕망의 과시를 할만하지.
그러나 역사상 큰 숙명을 벗어난 어디 목숨이 있었나. 지진에 몇 십만 목숨이 탈곡기볍씨처럼 추수되고 운석소나기에 공룡처럼 단숨에 멸종할 수도 있는데….
고뇌를 모르고 사는 동물이나 식물 무생물이 행복이지…. 인간만이 예언(prediction)하는 뇌의 과잉설계 때문에 고민하는구나. 그 중에서도 시인과 예언가들이 제일 불행이지. 어느 시인의 ‘뱀은 산양의 희고 부드러운 털과 우주와 죽음의 비의를 궤뚫는 혀를 지녔다’는 표현을 들여다보자.
삶은 두부에 파고든 미꾸라지를 먹어본 적이 있는데 미꾸라지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 칼로 두부를 잘라놓으니까 도막난 미꾸라지가 마치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이어서 그 단절과 추함의 상실감이라니…. 젓가락질이 한참이나 망설여졌네…. 이런 상상력을 가진 시인은 천형의 저주를 받았다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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