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배경 영문소설… 10개국 번역 큰 반향
美 전역서 연속 20주동안 베스트셀러 올라
88년 서울펜대회서 필자와 두번째 재회
고희 나이로 미국서 암 투병중 안타까워
‘순교자(殉敎者)의 작가 김은국(金恩國·미국명 Richard E Kim)씨가 미, 매사추세츠 한 시골에서 암투병중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놀랐다. 70대 중반에 암 치료 중이라니 안타깝다. 그의 소설 ‘순교자’는 일찍이 노벨상 후보에 올라 미국전역에서 연속 20주 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킨 작가였다. 그 바람에 10여 개국 언어로 번역, 지구촌 곳곳에서 크나큰 반응을 일으켰다.
40년 전, 그러니까 1967년경 일이었다. 그 후부터 한국작가들도 ‘한림원’ 창구를 엿보기 시작한 셈이다. 아직은 수상자를 못 냈지만…. 90년대 초반까지 김은국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는데 5·16 군사쿠데타를 다룬 ‘심판자’와 ‘잃어버린 이름’은 그가 겪은 6·25와 5·16, 일제식민지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지만 ‘순교자’보다 뒤진다는 평을 들어왔다.
시(詩 )든 소설이든 쓸수록 인기가 상승하는 것은 아니고 처녀작(데뷔작)이 곧 대표작이 되고 마는 경우가 있는데 김은국도 그 케이스라는 것이다. 시만 놓고 봐도 대전의 ‘한성기’의 ‘<驛>’이라든가 정훈의 ‘머들령’이 그렇고 ‘곽하신’의 소설 ‘新作路’가 그 예에 해당한다.
이점에 대해 ‘;앵무새 죽이기’라는 소설로 유명한 미 여류작가 ‘하퍼 리’만 해도 처녀작을 내고 수십 년간 왜 후속타가 없느냐고 묻자 ‘한 번 히트하고 나면 아래로 떨어지는 게 순리’라 했다는 말이 있다. 일본의 ‘가와바타(川端)도 노벨상을 받고 나선 후속타가 없었다.
김은국은 80년대에 와선 대학 강의, ‘헤밍웨이’ 소설번역, 그리고 TV 영상물 제작 등에 몰두했다. 그는 1932년 함경도 함흥 출생으로 유복한 기독교가정에서 자랐다.
6·25 전쟁 전에 월남, 목포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상대에 입학했다가 전쟁 중 통역장교로 종군했고 5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목포고교 동창으로는 소설 ‘광장(廣場)’의 작가로 유명한 ‘최인훈’과 동기라고 했다. 이 두 작가는 그래서 목포시민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필자가 그를 만난 건 85년으로 기억한다.
스위스 ‘루가노’ 세계 펜(PEN) 대회 때 한국대표로 갔다가 그곳 호반의 레스토랑에서 그를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일이 있다. 그의 부인 ‘페닐로프 앤 그롤’ 여사도 동석했다. 보기드문 미인이었다.
대화는 미국문단의 경향, 그 자신의 활동상, 그리고 세계 PEN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사롭게 남들과 만나기를 꺼리는 성격이라고 들어온 터에 행운아라 생각했다. 그 다음은 88년 서울 펜 대회 때 서울에서 만났는데 그 때는 회견용(신문제작)이었다.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면서 김은국 씨의 쾌유를 빈다.
-스위스의 루가노 세계 펜 대회 때 뵈옵고 한동안 KBS를 통해 선생의 왕성한 활동을 지켜봤습니다. 요즘은 어떠신가요.
▲요즘은 외도를 하고 있습니다. 비디오매체에 흠뻑 빠져 다큐멘터리 영상화작업에 몰두, 소설은 잠정휴업하고 있는 셈이지요.
-소설을 영상화, 또는 녹음(錄音)하는 작업, 이것이 어쩌면 산문(散文)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이란 시각이 있는 듯합니다. 일본의 노벨상후보라던 ‘이노우에 야스시’도 소설의 새 방향은 영상화라 말한 적이 있지요. 어떻든 KBS가 방영한 선생의 ‘소련 속의 한국인’ 대하물은 대단했습니다.
▲그 특집 물은 지난 4, 5월 소련 중부지역 알마타 ‘타슈켄트’ 일대에서 녹화한 것들입니다. 그곳엔 소련 내 40만 우리 교민 중 30만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시민들의 수준은 상상했던 것보다 아주 낮았어요. 생활용품이 크게 부족한데다 물품 공급이 배급제가 아닌데도 생산을 국가가 통제하기 때문에 돈을 갖고도 살 수가 없어요.
-교민들이 민족의 전통 같은 걸 전승하고 있던가요?
▲당초 소련으로 이주한 한국인 1세 대부분은 연해주(함경도)출신들로 이들은 주로 빈농 출신인데 만주에 잠시 머물다가 강제이주를 당했지요. 때문에 문화수준은 낮은 편이고 경어 사용 같은 건 거의 없고 어른한테도 순 반말 짓거리죠. 그 와중에도 50년대부터 북한에서 망명해온 사람들이 백일잔치, 추석 풍습 등을 전해줬지요.
-인종차별이나 원주민과의 적대감정 같은 건 없습니까?
▲요행이랄까.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족이 우리와 비슷한 인종으로 언어는 몽고, 중국어의 혼합형으로 수도 ‘알바타’에선 남자 한국인은 원주민과 구별하기 어려워요. 때문에 인종차별과 갈등은 없다고 했습니다.
-소련 내 한국교민들이 한반도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TV매체 등을 통해 한반도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으며 주민 대부분은 소련 유학 중 잔류했거나 정치적 이유로 망명한 사람들입니다. ‘통일과 평화’에 공감을 하면서도 소련 속의 북한 계 사람들은 ‘통일은 김일성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김일성이 죽고 나면 자신들이 돌아가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발상이지요. 때문에 ‘통일은 김일성 사망 후 자기들과 협상해야 하므로 서두르지 말라’는 식이지요.
-선생께선 북경도 다녀오셨지요. (당시는 미수교국)중국에 사는 우리 교민들의 생활상을 설명해 주시지요.
▲북경엔 지난해 7, 8월에 다녀왔습니다. 중국엔 약 200만 명의 교민이 사는데 만주 옌볜엔 조선민족자치구가 있지만 생활은 중국 본토보다 못하지요. 재미있는 것은 소련 인이 중국을 다녀오거나 중국인이 소련을 다녀오면 서로 ‘형편없다’고 평가절하 한다는 점입니다. 소련 도시엔 차도 없고 한산하기 이를 데 없지만 뒷골목엔 암달러상이 득실거리고 젊은 세대사이에는 고고와 디스코 바람이 한창이었습니다.
-김 선생님의 취재 성과를 요약해 주십시오.
▲저희 취재팀은 입국과 취재에 어려움은 없었으나 돌아올 때는 가져간 차량과 카메라 등 장비일체를 놓고 와야 했습니다. 이는 소련 측의 신형장비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우호라는 시각 때문이었지요. 취재성과라면 공산권의 이모저모를 서방세계에 알린 점이지요.
-서울 세계 펜 대회에서 김 교수께서 하실 일은?
▲제 임무는 보다 많은 공산권 작가들을 서울로 유치하는 일입니다. 동서간의 문화교류를 하는 데엔 저 같은 심부름꾼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공산권 작가들이 대거 참가한다면 이념극복에 일조가 되겠지요?
▲제 역할은 소련, 중국 등 공산권 작가 초청을 하는 일인데 소련작가 중 한국계인 ‘아나토리 김’이 못 오게 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녀는 국제대회에 자주 모습을 보여 온 유명한 작가로 얼마 전 ‘리스본’에서도 만났지요. 그때 서울 펜 대회에 참가할 뜻을 저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못 오게 된 것은 소련 작가동맹이 의도적으로 제외시킨 것이 분명합니다. 연락을 해보니 ‘시골에 갔다’, ‘작품 활동을 위해 타지로 갔다’고 했습니다. 이번 대회의 특징은 참가국 40개국 중 공산권국가 문인의 참가가 의외로 많습니다.
또 공산권에는 세계 펜 부회장이며 유고 회장인 ‘마트베이예비치’씨와 중국문인 8명, 소련 작가동맹 소속 6명도 포함되어 있지요. 우리는 이미 북한에도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아직 그들로부터 답신은 없으나 대회 당일까지 기다려 봐야지요.
-‘솔제니친’은 아직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가요?
▲예. 미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김 선생께선 통역장교로 종군하셨지요?
▲맞습니다.
-전쟁체험을 했기 때문에 ‘순교자(殉敎者)’와 같은 뛰어난 작품이 세상에 나왔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전쟁이 그 배경에 깔려 있는 건 사실입니다.
-순교자는 원래 영문으로 된 것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 아닙니까?
▲장왕록 선생께서 수고를 했습니다.
-‘순교자’는 한 때 노벨상후보로 거론된 작품으로 1964년 오하이오 주립대학 석사학위 논문으로 쓴 영문소설이지요?
▲그렇습니다.
-그 때 외신(外信)에선 호평들을 했고 특히 ‘뉴욕 타임스’ 등 권위 있는 잡지들은 ‘도스토예프스키’와 ‘까뮈’의 전통을 잇는 위대한 작품이라 평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평가에 이의(異議)는 없으신지요?
▲작품이란 독자와 평자(評者)의 손에 넘어가면 그땐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주관보다는 객관에 의해 평가를 받으니까 말입니다.
-‘순교자’ 이외에 5·16을 배경으로 한 ‘심판자’, 일제 때를 배경으로 한 ‘빼앗긴 이름’ 등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순교자는 빼어난 종교 소설이라며 신(神 )의 부재와 인간의 원죄(原罪)를 다룬 격조 높은 소설로 작품을 한국인과 한국을 무대로 삼아 한국의 개별성을 서구(西歐)의 보편성과 접목시켰다는 평들을 합니다.
▲‘순교자’는 이제 골동품이지요.(웃음) 당시엔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게 사실입니다만. 최근 미국문단도 젊은 작가들이 대거 튀어나온 데다 세대가 바뀐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등장한 작가들처럼 ‘아, 이젠 이런 風’이라야 한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여권운동 경험 탓인지 여류작가의 진출도 눈부시게 드러났지요.
-일본에선 재벌급 작가도 있고 소위 인기작가의 스텝 또는 주식회사 형태의 작가도 있습니다.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마쓰모도 세이조오(松本成張)’ 등이 이에 속한다고나 할까요. 그들의 글은 지면에 따라 문체(文體)가 다른 경우가 있는데 문하생들이 대필한다는 것이지요.
▲미국에도 그러한 작가가 없는 건 아닙니다. ‘제임스 미쉬아르나’ ‘스탠리 가드너’ 등이 대표적인 스텝을 활용하는 작가들이지요. 국장님이 지적하신 ‘마쓰모도 세이조오’가 ‘나카소네’ 총리의 연설문을 전담했다지만 ‘스텐리 가드너’도 조금은 외도를 했거든요.
-문단 일각에선 6·25라는 큰 전쟁을 겪고서도 뛰어난 작품이 없다는 평인데 이점 한 말씀해 주시지요.
▲그런 평가는 세대 문제에서 비롯한 것으로 우리로 치면 50대가 참전세대지요. 결국 그 세대 내 인물 부족이 참다운 전쟁 문학을 못 그려냈다는 이야기지요. 또 미국 문단에선 한국 전쟁에 관한 작품을 거의 볼 수 없는데 그것은 참전숫자가 적은데다 군인에 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2차 세계대전을 그린 작품은 많습니다.
-북한에는 언제 다녀오셨습니까?
▲3년 전에 다녀왔습니다. 우선 남과 북이 마음의 장벽을 헐고 서로 열린 마음에서 열린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것이 곧 통일로 가는 길인데 저의 꿈은 고향을 찾아 부모님 산소를 성묘하는 일입니다.
-끝으로 향후 선생의 창작활동 계획에 대해 한 말씀을….
▲당분간은 다큐멘터리의영상화 작업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바쁘신 일정을 할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1988. 8.10)
▲ 처녀작 ‘순교자’가 베스트셀러가 된 직후인 1964년 찍은 김은국 부부사진. |
▲아들 데이비드와 딸 엘리사와의 행복한 한때. 1964년 찍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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