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가 기억자로 굽어 제대로 서기 조차 힘들다 보니 지팡이를 두 개나 짚고서야 간신히 버티고 있는 여든의 노인. 그러나 그림 속 고야의 눈길은 성성하다 못해 보는 이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서른의 고개를 넘어 마흔의 길로 막 들어서면서 ‘인생 까짓 것 뭐 별거 있어?’ 그러면서 나른한 숨을 들이쉬고 있던 차에 벼락을 맞은 그런 느낌. 마치 인생의 한 고비를 넘은 듯, 알 거 다 안다는 듯 교만해지고 있던 정수리에 쏟아진 차가운 물. ‘지금도 나는 배운다’라는 그림은 지금까지 내가 걸어 온 길과 그 길에서 뿌린 숱한 말이 떠올라 고개를 들기 어렵게 만들었다.
자기가 내딛는 순간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온 고야가 내뱉은 말은 아니 한 장의 그림은 내게 날카로운 창이 되어 꽂혔다. 그러면서 내가 만난 숱한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 이젠 이름조차 아득한 아이들 얼굴이 먹구름처럼 밀려와 가슴이 답답해졌다.
도대체 고야는 무얼 배우려고 했던 걸까?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맛본 여든의 삶이 배우고자 했던 것은 무얼까? 쓸쓸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점점 새로운 것에 고개를 돌리고, 과거를 돌아보며 그 속에 갇히려 하고 있었다. 당연히 내 몸과 마음은 뻣뻣해져 가고, 겁이 없어지고 있다. 한 장의 그림에 비추어진 모습을 들여다 보다 나는 불화로를 뒤집어 쓴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배우려는 사람의 자세는 낮다. 마음과 몸을 낮출 때 세상은 곁을 내주고 사람들은 마음자락을 내놓는다. 거기서 배움이 시작된다. 그래서 배우는 사람은 늘 겸손하다. 그래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가르침과 배움은 동전의 앞 뒤면과 같은데 나는 선생이라는 자리에서 늘 가르친다는 한쪽 면만으로 세상을 살아왔다. 배우려는데 게을렀고, 진정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배움이 없는 가르침은 헛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아이들 역시 내게 숱한 가르침을 주었다. 무엇에 기대지 않은 상상력과 세상을 편견없이 바라보는 법과 용서하는 법과 사랑하는 법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나는 아이들에게 하나도 배우지 않았다. 아니 배운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들보다 더 옹졸하고 편협되게 세상과 사람을 만났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며 자책했다. 잠시만 숨을 고르고 돌아보면, 매일 만나는 아이들을 조금만 더 열린 마음으로 들여다 보았으면 덜 괴롭고 덜 힘들었을 텐데….
고야를 만난 마흔의 나는 이제야 닫혔던 마음의 빗장을 조금 풀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만나는 모든 것이 귀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고야의 그림을 본 뒤 나는 그렇게 마음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나는 마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배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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