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공원에 가면 그들 나름으로 패전이후 평화를 기원한다며 세운 전쟁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의 전시 컨셉트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전쟁 피해자로서 평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대동아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가해국 일본은 온 데 간 데 없고, 미국의 ‘야만’에 의해 폐허가 된 가련한 일본이 존재하는 것이다.
전쟁논리로 볼 때 진주만 습격이 원인이라면, 히로시마 원폭투하는 결과이다. 그러나 일본에는 원인이 없다. 따라서 평화공원은 처참한 참상을 보존한 채 온갖 엄살을 부리며, 오직 평화만을 신봉하는 양 천연덕스럽게 가장(假裝)을 하고 있다.
이런 일본과 더불어 역사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왜냐하면, 일본은 역사나 진실을 재는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힘이 있으면 칼의 잣대, 힘이 약하면 사쿠라의 잣대를 이용한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강국이라 판단되면 칼의 논리를 적용하기에 과거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작도 가능하고, 자의적 선택도 가능하다. 힘이 지나간 과거는 폭력과 야만이 할퀸 상처뿐이다. 그래서 가해의 과거는 없고, 현재와 미래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역사가 과거임으로 독도를 역사적 관점에서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적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과거 피해의식이 작용한 때문임으로 감정적이며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자신들은 여하한 상황에서도 차분히 이성적으로 대처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가 독도문제를 이성적으로 접근하여 일본이 주장하는 대화와 협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바꿔 말해 대화와 협상을 하지 않는 것은 억지이고 비이성적 행위라는 것이다.
일본은 독도문제를 우리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를 향해 한국의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을 선전하여, 결국 독도 문제를 한국이 감정적으로 대처하고 있음을 알리고, 협상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전략적 노림수가 깔려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독도문제를 가지고 일본과 대화를 나누거나 협상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독도가 우리 땅임으로 결과는 본전 밖에 나올 것이 없다. 세계 어느 나라가 이런 대화와 협상을 할 것인가.
일본의 이런 논리와 야욕에 동조의 뜻을 밝혀 매국의 혼을 부활시키려는 식자(識者)가 생겼다는 소식이다. 힘과 이득 앞에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답게 굴어, 그래서 외교적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마다 상대국에 알아서 기지 못하는 것을 질타하는 한국인이 있어 참담하고 아뜩할 뿐이다. 외교가 서로 겨루어 명분과 실리를 챙기는 것인데, 외교 이전에 강자(强者) 성질 건드리지 말고, 노림수 알려하지 말고, 무조건 내주라니 뭔 소린지 도통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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