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세월 속에서도 변함없는 ‘녹음예찬’

흐르는 세월 속에서도 변함없는 ‘녹음예찬’

[안영진의 충청비사] (57) 5월의 ‘메타포’

  • 승인 2006-05-25 00:00
  • 前 중도일보 주필前 중도일보 주필
‘푸른 들녘·화사한 꽃들’ 문학인들의 단골소재
유성출신 가수 문정선씨 ‘보리밭’ 가사도 유명
다다이즘·자연주의 등 철학·사상에도 큰 영향


5월은 푸르고 싱그럽다. 지표(地表)가 온통 녹음으로 뒤덮인 5월의 끝자락. 온갖 꽃 피어나는 5월을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계절의 여왕’이라 불러왔다. 그래서 시민들은 자연의 품을 찾게 되고 화가들은 자연을 화폭에 담으며 시인들은 노래를 부르기 마련이다. 이쯤 되다보면 저 유명한 ‘하이네’의 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5월은 아름다운 철
온갖 꽃 피어날 때
내 소원 내 희망을
님에게 호소했소.

5월은 좋은 시절
온갖 새 노래할 때
내 희망 내 소원을
그에게 털어 놨소.
라고….










미구에 장미도 화사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맘때면 ‘릴케’가 애인에게 장미꽃을 꺾어 주려다 가시에 찔려 화농된 채 죽어갔다는 ‘릴케’ 이야기가 제격일지 모른다. 애인 ‘에르이빌’과의 ‘순애보’…. ‘릴케’를 ‘장미의 시인’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요즘 월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올라 담장을 뒤덮고 있는데 수선화(水仙花)도 질세라 그 자태를 뽐낸다. 꽃 이야기를 들춰내다 보면 ‘에드워드’가 떠오르는데 자연에 반해 주옥같은 시어(詩語)를 세상에 남긴 ‘수선화시인’….

이 모두는 계절과 함께 어우러진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꽃을 노래한 시인은 수없이 많지만 누군가는 ‘소나무꽃(송화가루)’, ‘민들레꽃’ 그리고 ‘질경이꽃’, ‘무화과’까지 노래했다. 이 고장 출신 이생진(李生珍)은 모내기 전 논바닥에 돌미나리와 뒤엉켜 생식하는 자운영(紫雲英)을 찬미했고 미국의 민중시인 ‘휘트먼’은 ‘크로버’ 들판에 돌처럼 던져 누워 푸르름을 노래했다. 요즘 도심을 벗어나 농촌에 발을 드리우면 검푸른 보리밭과 곧장 만날 수 있다.

가난했던 시절, 보릿고개를 맞아 풋보리 이삭을 손톱으로 비집어 보며 여물기를 기다렸던 그 시절. 요즘 보리밭에 목을 빼든 보리이삭들이 훈풍에 흔들리는 모습들이란 참으로 장관이다. 그럴 때면 ‘보리밭 사이 길로 걸어 가면은…’ 유성출신 가수 ‘문정선’이 노래가 떠오른다. 또 있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문둥이 새끼올시다…”라고 자학하던 ‘한하운(韓何雲)’은 ‘보리피리’를 ‘휠리릴리, 휠리릴리’하고 거듭 불어댔다.

보리이삭이 영글 무렵이면 그 이랑 속엔 ‘깜부기’가 전염병처럼 번져 보리농사를 망치는 일까지 있었다. ‘깜부기’는 일명 흑맥(黑麥)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고장이 낳은 작가 이문구(李文求)는 ‘흑맥’이라는 소설로 한 시대 필명을 날린 적이 있는데 양아치를 ‘깜부기’로 형상화시킨 작품이었다.

보문산 산책로를 걷거나 공원을 찾아가면 녹음이 가져다주는 그 내음은 더없이 싱그럽고 이채롭다. 훈풍이 스쳐지나갈 때면 그 내음은 더욱 진하게 코끝을 자극한다. 그래서 ‘이양하(李敭河)’의 ‘녹음예찬’ 같은 에세이는 감동을 더하는데 ‘이효석(李孝石)’에 이르면 더욱 농도 짙게 그것을 그려냈다. 그의 ‘자연예찬’ 중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숲속에 들어가 나무와 마주서서 대화를 나누다보면 나의 체내에도 수액(樹液)이 흐르는 것 같다”고 했다. 이 얼마나 기막힌 감성이며 직관인가. 그는 소설 ‘메밀꽃 필 무렵’으로도 유명하지만 일각에선 자연주의 작가라 지목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는 ‘유진오(兪鎭午)’ 등과 함께 ‘주지파(主知派)’대열에 속하는 인물로 평하기도 한다.

이효석은 ‘계절’이라는 단편에선 그의 두 얼굴을 드러낸다. 소설의 주인공은 지하운동을 하는 인텔리로 쫓기는 몸이지만 애인을 만나 하룻밤을 같이한다. 여주인공이 새벽에 눈을 떠보니 베개엔 눈물이 번져 있고 옆엔 ‘메모지’가 놓여있다. 메모지 옆엔 애인이 애지중지하던 회중시계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메모내용은 이러했다. “시계를 놓고 간다. 앞으로는 주야(晝夜) 구별 없이 뛰어다녀야 하기 때문에 시계가 필요 없을 것 같아 주고 간다”는 사연이다.

이 도령이 춘향에게 나본 듯이 간직하라며 거울을 쥐어 주고 한양으로 떠난 그 심정과 같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엔 논리와 정서면에서 무리(비약)가 뒤따른다. 지하운동을 하려면 시계는 더없이 소중한 물건인데 이효석은 천재적 작가지만 이렇듯 논리와 과학성을 챙기지 못한 구석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희대의 평가(評家) ‘이어령’으로부터 호되게 얻어맞은 일이 있다.

그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에선 주인공 ‘장돌뱅이’ 부자(사생아)를 확인시키는 근거(장면)로 왼손잡이 공통점을 내세웠는데 이어령은 의학계의 견해(과학성)를 들어 왼손잡이 유전(遺傳)설을 부인하고 나섰다.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염상섭의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에 대해서도 비수를 들이댔다. 개구리는 냉혈동물인데 배에서 어떻게 김이 피어오르느냐고….

그 바람에 그 소설의 인기는 반감을 했다. 만약 이어령이 ‘계절’이라는 소설을 꼼꼼히 읽었더라면 24시간 지하운동을 해야 할 사람이 시계가 필요 없다고 놓고 간 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효석은 어떻든 ‘자연주의(自然主義)’와 ‘주지주의(主知主義)’ 쪽을 오락가락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이 모두 계절과 ‘이즘’의 영향 탓이라 한다면 결례가 될지 모르겠다.


문학가 ‘이상’ 녹색을 권태에 비유

만인이 무릇 사상(事象)을 놓고 평하는 시각은 언제나 일정치 않았다. 예술가와 철학자, 사상가를 막론하고 항상 다른 눈(관념)과 잣대로 사물을 가위질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 유명한 철학자 ‘헤겔’의 경우를 봐도 이를 실감할 수 있다. 그가 하루는 친구와 옥상에 올라가 밤하늘을 쳐다보며 “아름답다, 별무리(星座)가 꼭 여왕의 관(冠)에 박힌 보석처럼 찬란하다”고 말하자 그의 친구는 뱉듯이 이렇게 응수했다.

“아니지. 그것은 우주의 표피(表皮)에 돋아난 부스럼(피부병)일 뿐이야!”라고 맞섰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정치인 역시 마찬가지다. 한쪽에선 ‘못 살겠다’며 실정(失政)을 탄하면 상대는 “그래도 이만큼 좋아졌다”고 응수한다. 예술가의 경우는 더욱더 심한 편인데 예를 들어 우리 문단의 귀재라는 이상(李箱)은 어떠했는가. 요즘처럼 지표(地表)를 뒤덮은 녹음을 바라보며 예찬은커녕 기막힌 야유를 보냈다.

그의 에세이 ‘권태(倦怠)’를 읽어 보면 그것이 잘 드러난다. 수채화처럼 싱그러운 그린(green)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매도한 것이다. “이 녹색은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하고 나서 지구의 표피가 하도 삭막하다 보니 궁여지책에서 일괄, 녹색 칠을 한 것이라고….” 바꿔 말하면 조물주의 몰취미(沒趣味)요, 작희(작란)라는 것이다. 그는 자연과 녹음을 ‘권태’로 파악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소설(대표작) ‘날개’에서도 그런 경향은 짙게 드러난다.

아내는 분을 바르고 술집에 나가 시시덕거리며 손님 시중을 드는데 남편은 집에서 혼자 빈둥거리며 아내가 던져 주고 간 은화(은전)를 굴리며 노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자적(自適)하는 인텔리…. 이에 대해 누군가는 자의식(自意識)의 분열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다. 작가 ‘이상’에 대해 ‘다다이즘(dadaism)’의 작가라 평하지만 그는 그 영향(모방)을 받았을 뿐 그가 주역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럼 ‘다다이즘’이란 무엇인가. 구질서, 모든 가치와 예술 양식을 부정, 반도덕과 비합리성, 비심미(非審美)적인 것을 찬미, 새로운 예술양식을 추구하려던 한 시대의 사조를 말한다. 그것이 1920년대를 전후해서 유럽, 미국 등을 휩쓸었으나 한국에 정착한 일은 없었다. 1차 대전 전후에 걸쳐 문학, 미술 등 예술가들이 스위스 ‘취리히’에 모여 깃발을 흔들며 한 시대를 주름잡았고 그 때 이미 전위 미술이 행세를 한 걸로 되어 있다.

거기에는 독일의 군국주의와 자본가 층을 통렬하게 비판한 화가 ‘G 크로스’가 있었고 파리의 ‘다다’도 활발하게 움직였으나 이 고비를 지나 이들은 파괴와 부정을 초월, 무의식의 영역에서 미지의 현실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 물결이 잠잠해질 무렵 조류는 이미 ‘서리얼리즘(surrealism-초현실주의)’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다다이즘’이 그 시대 유럽에 얼마나 파고(波高)를 높였는가 하는 점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자연 앞에 겸손하게

소생과 성장의 철 앞에 우리 모두는 자연을 바라보며 때로는 그 품에 안기기도 하고 여러 생각에 젖게 된다. 자연은 위대한 존재일 뿐 아니라 그것은 또 질서인 동시에 우리들의 모태(母胎)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루소’를 생각하게 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던 루소.
― 10대에는 과자에 움직이고 20대엔 연인에 매달리며 30대는 쾌락에 40대는 야망 따라 50대는 탐욕에 매달린다. ― 고 했다.

하지만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한결같이 외쳤다. 문예사조로 따지면 자연주의 비조는 ‘E 졸라’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그 일당은 과학자와 박물학자와 같은 눈으로 사상을 관찰하며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자연주의는 ‘검증주의’와 ‘다윈’의 ‘종(種)의 기원’ 등이 토대가 되었으며 과학과 자연, 물리적 조건 하에 있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라는 운동이었다. 그 물결은 유럽 여러 나라에 영향을 끼쳤고 특히 연극계에서는 선풍적인 붐을 일으켰다.

덴마크의 ‘JP 야콥센’, 이탈리아의 ‘G 베르가’, 러시아의 ‘A 체호프’, 노르웨이의 ‘H 입센’ 등은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작가들이다. 특히 ‘헨리입센’은 여성해방운동을 유도한 작가로 대표작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는 부러울 것 없는 주부지만 평범한 사랑이 싫다고 가출을 한다. 유명한 이야기다. 한국문단에서도 ‘자연주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주요한’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경향의 작품을 써낸 것은 ‘약한 자의 슬픔’의 김동인이었다.

그는 ‘창조(문예지)’에 그것을 발표했고 ‘전영택’이 ‘혜선의 사(死)’를 실었지만 이들은 자연주의 수법을 배운 바 없기 때문에 모방 성격이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한 가지 당대 계몽주의로 일관하던 춘원(이광수) 등에 맞서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한 셈이었다. 그 후 ‘현진건’의 ‘빈처’, ‘전영택’의 ‘운명’,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나도향’의 ‘젊은이의 시절’ 등으로 이어졌다.

이제 계절은 5월의 끝자락에서 6월을 넘본다. 아름답고 은총적인 계절에 우리 인간은 무엇을 생각하고 또 어디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가. 지축(地軸)을 딛고 미래를 향해 비상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되며, 또 과거를 잊어서도 곤란하다. 현실과 미래, 그리고 과거를 연결 짓는 역사인식 또한 소홀히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역사란 과거와의 부단한 대화(對話)’라면 과거는 박제(剝製)가 아니라 오늘의 모태(母胎)라 할 수 있다. 그러니 과거를 폐광지대에 버려진 ‘버럭’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 이생진 씨
▲ 이생진 씨
▲ 한하운 씨
▲ 한하운 씨
▲ 이문구 씨
▲ 이문구 씨
▲ 문정선 씨
▲ 문정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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