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만능 현대인 자연·서정·인본 외면 안타까워
석가 득도한 ‘보리수나무’ 다시 심어 1천살 불과
성지에 세운 세계최초 대학에 신라 ‘혜초’가 유학
‘석가탄일’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위하여 또, 어느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 눈을 뜨면 현대인은 경제와 과학의 노예가 되어 몸을 추스르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물질지상’, ‘황금만능주의’에 길들여져 딴 것은 관심 밖의 일로 치부하기 일쑤다. 매사를 경제적 잣대(尺度)로 계량하기 때문에 자연(自然)과 서정(情緖), 인본(人本), 타애(他愛) 같은 건 거들떠보지 않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래서 한주만이라도 석가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볼 요령으로 또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낸다. 기자시절 10여 년간 종교담당을 해온 탓에 중국, 동남아, 일본 등의 종교 실태와 인도 불교성지를 취재한 일이 있다. 그와 같은 추억 탓에 석가이야기를 또 꺼낸다.
제빛 잃어가는 삼존마애불
우리나라 문화재하면 불교유물이 근간을 이루는데 서산의 ‘마애삼존불’은 국보 중의 국보로서 더없이 귀한 유산이다. 일명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삼존불(三尊佛)이 보호각을 철거한 뒤 그 온화한 웃음이 퇴색했다 해서 모두들 안타까워한다. 문화재청의 견해는 이렇다. “폐쇄성 보호각 때문에 불상에 습기가 차서 석불이 훼손되어 간다는 의견 때문에 보호각을 해체시켰다”고 경위를 밝혔다. 그래서 오는 10월까지 여론추이와 석불의 환경변이를 지켜본 후 대책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마애삼존불’의 아름다운 그 미소는 영원히 유지, 보존시켜야 한다는 게 불가 모두의 바람이다. 인도, 신라, 고구려, 중국, 일본 태국, 어디엘 가 봐도 그토록 아름다운 자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크기로 따지면 논산의 은진미륵, 천안 태조산 부처, 법주사 대불 등이 있다. 그리고 좌(坐)불로는 일본의 법륭사(法隆寺) 큰 부처, 교토 동대사(東大寺)에는 천불상, 인도 성지의 와불(臥佛) 등 그 어느 곳에도 ‘마애삼존불’처럼 사시시 웃음 짓는 평화스런 불상은 없다. 이는 백제 장인(匠人)의 솜씨가 그토록 뛰어나 있었다는 이야기이고 심령(마음씨) 또한 평화로웠다는 걸 뜻한다. 어떻든 불교가 어느 경로를 통해 이 땅에 들어왔으며 또 부침(浮沈)하였는가를 챙겨 볼 그런 계절이다. 삼국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 때만 해도 불교는 국교로 행세해왔고 그래서 중들이 성안(왕실)을 자유로이 드나들었으며 도심에다 절을 짓기도 했다.
그것이 조선조에 들어서며 중국의 양명학과 실학 등에 밀려 배불(排佛)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조선시대 세운 사찰이나 불상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불교 전성기에는 사찰이 도심의 민가와 추녀를 같이해오다 불교 박해시대에 이르면 산중에 세워졌다. 그 무렵 부처님의 표정은 어두울 뿐만 아니라 얼마간 고개를 숙인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부처를 만드는 장인(匠人)의 심령이 무겁기 때문에 부처의 표정 또한 밝질 못하고 어둡게 드러난 것이다. 동북아에 포진하고 있는 건 대승(大乘)불교이며 동남아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소승(小乘)불교라 보아 틀림이 없다. 소승은 작은(劣小) 수레를 말하는 것으로 많은 중생을 싣고 피안(彼岸)에 이를 수 없다는 데서 유래한 칭호였다. 반면 대승(大乘)이란 큰 수레를 뜻하는 것으로 진보적 혁신파임을 자칭한 쪽에서는 과거의 기성불교를 소승이라 폄하하면서 발전해온 발자취를 지닌다.
내가 달려갔던 불교 聖地
불교발상지는 분명 인도이다. 하지만 인도가 석가의 탄생지에 걸 맞는 불교천국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인도는 종교천국이라 할 만큼 각종 종교가 공존하지만 힌두교가 전 인구의 81.5%를 차지하고 있다. 11억 인구의 80%라면 이는 천문학적 수치다. 그 다음 회교 11.2%, 시크교 2.4%, 기독교 2.7%, 불교 0.7%, 자이나교 1%로 되어 있다.
또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로는 불교와 자이나교, 힌두교, 시크교가 있으나 이중 불교는 기독교와 함께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해왔음에도 불교는 인도에서 교세가 미미하다. 세계의 불교신도 총수는 5억이며 미국, EU, 아프리카 등으로 상륙한지도 오래다.
인도는 각종 종교가 공존하는 종교대국답계 인도 정부에선 각급 종교의 공존과 사회적 통합을 꾀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하지만 인도 국민들이 지나치게 종교에 빠져 있어 행정부에선 애를 먹는 듯한 인상이었다. 지난 50년대 이야기다. 비동맹의 ‘리더’, 네루총리가 오죽했으면 ‘종교란 흥(興)을 죽이는 행위’라며 볼멘소리를 했겠는가. 오래전에 필자는 한 달간 인도에 머물며 여러 곳을 돌아봤지만 성지는 광활하고 큰 종교가 되어 취재가 쉽지 않았다. 그 바람에 고생 꽤나 했다. 하지만 기행문을 9개월 이상 연재하다 보니 귀동냥 꽤나 한 셈이었다. 불교성지는 장날처럼 관광객과 수도승, 순례자들로 늘 붐비고 있었다.
요즘엔 인도의 경제가 날로 커지며 위상 또한 높아져 그곳 유적들도 많이 복원됐으리라 짐작한다. 그 무렵엔 손댈 곳, 복원해야 할 구석이 너무나 많다는 인상을 받았다. 인도는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 ‘자이나’, ‘시크’의 성지요, 세계적 관광지라지만 성지주변의 환경이란 그야말로 원시적 형태였다. 성지주변엔 소떼가 뒹굴며 방뇨를 하고 골목은 사람냄새, 식당에선 진한 향(香)내음이 코를 찌른다. 하기야 수도 뉴델리 한복판 교통정리대(신호등)엔 황소가 비스듬히 누워 행인들을 지켜보며 삭임질을 하고 있었다.
불교에도 神話는 있다
인도의 불교 4대 성지(聖地)엘 가보면 고색이 창연한 유물, 유적과 함께 숱한 신화가 나뒹구는 걸 엿볼 수 있다. 석가출생지 ‘룸비니’는 이제 네팔 땅으로 ‘카비라’ 성지엔 옛날 초석과 계단 등이 남아있어 역사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석가가 득도한 최고의 승지(聖地) ‘부다가야’엔 보리수나무가 옛일을 알려주는 듯 무성히 자라고 있다. 그 보리수는 석가가 득도할 당시의 것은 아니다. 2500년 전 나무가 오늘에 살아있을 리 없다. 7~8명이 양팔을 벌려 감싸도 닿을까말까 한 큰 나무였다.
이 나무는 중간에 다시 심은 것이라 하니 수령(樹令)이 1000년은 되리라고 말했다. 석가가 이 나무 밑 좌대에 앉아 득도했다는 최고의 승지…. 여기엔 연일 수도자와 승려, 관광객이 몰려들어 장터처럼 붐빈다. 그 다음 득도 후 첫 설법지 ‘사르나트’는 다섯 제자 앞에서 석가가 ‘연(緣)’과 ‘기(起)’, 그리고 ‘열반(涅槃)’을 가르쳐 크게 호응을 얻은 곳이다. 이곳에는 석가와 다섯 제자 상(像)을 밀랍으로 조형, 눈길을 끌고 있었다. 석가가 입적한 ‘사르나트’엔 나중에 제자들이 와불(臥佛)을 축조했는데 누워 있는 이 부처는 길이 20m 정도의 크기였다.
그 거창한 부처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모습인데 유독 발목과 발가락이 커 보였다. 설법을 위해 전국을 수없이 돌아다닌 ‘맨발’이며 ‘마당발’ 탓일까. 불교박물관엘 가보면 아소카왕의 조각물, 코끼리가 왕비의 갈비 속으로 들어와 석가를 출산했다는 태몽그림, 석가가 수행 중 탈진해 있을 때 처녀(일선엔 창녀)가 끓여 준 젖 죽을 받아드는 장면 등 행적들을 그려 놓았다. 매우 인상적인 동양화였다. 이밖에도 4대 성지, 8대 성지 등엔 갖가지 유물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또 ‘나아린다’에는 세계최초의 대학을 설립, 종국의 현장, 신라의 ‘혜초’가 유학을 했고 전성기엔 1만 여명의 수도승이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부처는 생전 진리만을 설파했을 뿐 신화나 ‘형이상(形而上)’의 그 어떤 언행을 드러낸 일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함에도 석가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신화는 구전(口傳)으로 이어지고 있다. 신화 한 가지만 소개를 하자. 하루는 석가가 마귀로 둔갑, 선정을 베푼다는 어느 왕을 찾아가 속을 떠 봤다.
“나는 지존한 가르침을 갖고 있는데 이를 왕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하자 왕은 겸손한 자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배를 채우고 나서 전하겠다는 말에 왕은 진한 요리 상을 차리려 했다. 이에 마귀는 손을 내저으며 나는 사람의 따뜻한 피와 살을 먹고 싶다며 그것을 강요하고 나섰다. 왕은 진리를 터득하고 나서 몸을 내놓겠다고 했다. 악마가 말하는 진리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애증(愛憎)으로 해서 괴로워하고 탐욕 때문에 번뇌를 하게 된다. 여기서 벗어나면 미움도 번뇌도 사라지는 이른바 무아(無我)의 지경에 이른다”며 마귀는 금시 부처로 탈바꿈 하더라는 이야기…. 잡혀 먹힌 왕비와 왕자도 원상으로 돌아왔다는 부처를 둘러싼 신화가 전해온다.
석가의 마지막 가르침
석가는 45년간 중생제도(衆生濟度)를 위해 진리를 설법하고 다녔다. 그는 80세가 되던 해 ‘룸비니’, 다시 말해 태어난 고향을 향해 나섰다가 도중 ‘사르나트’에서 잠시 머무는 중이었다. 그의 육신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시시각각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 당시 80세라면 보통사람의 두 배 수(壽)를 누린 셈이지만 그것을 지탱해 온 건 정신력이었다.
그는 두 그루의 ‘사리수’ 나무 사이에 들어 누운 후 다시는 일어나질 못했다. 이어 촛불이 꺼지 듯 조용히 숨을 거뒀는데 그 종언(終焉)은 타종교의 지도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석가는 몰(沒)하기 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법을 설했다. 인간적이며 성자다운 그 가르침은 오늘날 ‘억조창생’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 제자들에게 한 말은 다음과 같다.
法燈明(법등명), 自燈明(자등명).
“나는 너희들에게 모든 것을 전수했다. 더 이상 할 말도 줄 것도 감출 것도 남길 것 또한 없다. 그간 너희들이 나를 의지해왔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니 남에게 의지할 생각은 아예 접고 너 스스로에게 의지하라. 그리고 법(法)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할 생각을 마라.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 그러니 쉼 없이 정진할지어다.” ‘무소유’, ‘공수래공수거’한 석가였다. 그는 이렇다 할 고통이나 몸부림 없이 깨달음의 경지에서 촛불이 꺼지듯 그렇게 입적을 했다. 그럼 오늘의 경전(佛經)은 어떻게 쓰여 졌는가.
석가의 가르침은 행(行)이요, 구전(口傳)일 뿐 생시엔 경전이라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여기서 제자들은 그들이 준거해야 할 법(法)과 율(律)을 정비하기에 이르렀다. 수제자 ‘마하가섭’의 주도로 첫 번째 ‘경전편찬회’를 열었는데 여기엔 500명의 비구니가 모였다. 이에 ‘아닐타’가 평소 석가의 가르침을 독송(讀頌)하고 ‘우빨라’는 율을 암송한 것으로 전해온다. 그리고 두 번째 모임을 가진 후 얼마 안 가 ‘대승’과 ‘소승’으로 갈라지며 대승은 한국, 일본, 대만 쪽으로 소승은 태국, 캄보디아, 스리랑카 등으로 유입됐다. 석탄일을 보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부처의 가르침 중 한 구절만이라도 실행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