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고구려 372년 중국서 전해져
1993년 신문연재위해 한달간 인도여행
유적보존보다 관광수입 열올려 아쉬움
5월은 푸르다. 신록이 우거지고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5월은 ‘릴케의 달’이라 시인들은 말하지만 5일은 ‘석가탄신일’로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석가의 ‘크나큰 미소’가 12방 세계로 번지는 날이다. 그래서 ‘억조창생’은 은총적인 삶을 영위하는 지 모른다. 벌써 불교도들은 ‘코끼리像’을 앞세워 시가행렬을 펼치며 사찰과 가로수엔 연등을 달아 석가의 가르침에 한발 더 다가서고 있다.
거미줄 이야기
극락(極樂)의 정오. 연꽃이 만발한 못가[池邊]를 석가(釋迦)는 산책 중이었다. 산들바람이 지나갈 때면 연잎 위에 솟아난 꽃대궁도 못이기는 척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석가는 천인만야 아득한 저 밑바닥 지옥을 내려다보는 중인데 그곳이야 말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아수라장이다. 거기에는 이승에서 못된 짓을 한 자들이 유황불에 타고 있었다. 몸뚱아리가 지글지글 타올라 극락 근처까지 그 냄새가 풍기는 듯 했다.
석가는 잠시 무슨 생각에 젖어 있었다. 지옥에선 한 거한(巨漢)이 죄인들을 이리치고 저리 밟으며 괴롭히고 있는 중이다. 석가는 그 악한의 이력을 뽑아보았다. 그 흉악범은 이승에서 살인, 폭행, 강도, 강간 등 온갖 범죄를 저지른 자로 지옥에 와서도 그 짓을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한데, 이 악한의 이력 중에는 아주 작은 선행(善行)기록이 적혀 있었다. 자선을 한 것도 아니요, 땀 흘려 누구를 구해준 것도 아니다. 그럼 어떤 내용인가.
어느 날 산길을 걸어가다 왕거미 한 마리가 기어가는데 밟아 죽일까 하다 그냥 놔준 것뿐이다. 그의 성깔로 보아 밟아 죽일 법도 한데 무슨 생각에 그냥 지나쳐 버린 일…. 석가는 생각 끝에 지옥에 거미줄을 내려 보냈다. 거미줄은 금빛을 발하며 어둠침침한 지옥 길을 흔들거리며 내려갔다.
그것이 지옥에 이르자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거미줄만 붙들면 극락으로 오를 수 있기 때문에 결사적이었다.
여기서 문제의 거한이 그냥 있을 리 없다. 주변을 완력으로 물리치고 거미줄을 거머쥐더니 매달리는 자들에게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는다. 거미줄은 서서히 극락을 향해 올라오는 중인데 그 악한의 행패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이 줄을 타고 혼자만 극락에 오르겠다는 욕심에 먼저 매달린 자는 끌어 내리고 뒤따른 자는 발로 걷어차며 소동을 벌인다.
이때 거미줄이 휘청거리더니 뚝 끊어지며 매달린 자 모두 지옥으로 곤두박질치는 게 아닌가. 이때 석가는 안타까운 듯 ‘쯧쯧’ 혀를 차며 발길을 저쪽으로 옮겼다. 이는 ‘픽션’이다. ‘아쿠타가와(芥川龍之助)’의 ‘거미줄’이라는 소설내용인데 석가의 ‘자비정신’과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을 강조하고 있다.
관용정신. 거미를 밟아 죽이지 않았다는 그 작은 선행(?)도 연(緣)으로 통한다는 불가의 자비정신을 설명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광수의 ‘원효대사’, ‘이차돈의 死’, ‘꿈’ 등이 있지만 딱딱(심오)한 경전과 강론을 접하기 보다는 소설을 먼저 읽는 것도 불교 입문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고행 끝 35세에 得道
석가는 동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맥 남쪽 ‘로히니’ 강변 ‘카비라’ 성주 ‘슈터타마(淨飯)’와 그의 비(妃), ‘마야(麻耶)’ 사이에서 태어난 귀한 몸이었다. 그러니 예수나 유일신(모하메트)과는 출신성분이 확연히 다르다. 20년의 기다림 속에 태어난 태자이고 보면 성주의 기쁨은 말할 것 없고 성내가 온통 축하분위기였다. 마야부인은 태몽에서 흰 코끼리[白象]가 그녀의 오른쪽 갈비를 뚫고 들어오는 장면을 보았다.
불교의식에서 코끼리가 등장하는 건 이와 같은 배경 때문이다. 산월이 가까워지자 ‘마야’ 비는 관습에 따라 아기를 낳으러 친정으로 가는 길이었다. 도중 ‘룸비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맞은편에 ‘아쇼카’ 꽃이 만발해 있어 꽃 한 가지를 꺾어 들다 돌연 복통이 일어 아기(석가)를 출산한 것이다. 그날이 4월 ‘초파일’이었다.
이 소식이 성안에 전해지자 모두들 기뻐했고 태자이름을 지었는데 ‘코다마’는 성이요, ‘실닷다’는 이름으로 ‘깨달은 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왕비는 이 기쁨을 오래 간직하질 못하고 7일 만에 세상을 떴고 그래서 태자는 소년시절 이모 손에 자랐다. 그 무렵 ‘카비라’성 근처엔 ‘사이타’라는 선인(仙人)이 수행 차 머물고 있었는데 가끔 성안에 들러 석가의 노는 모습에서 범상치 않음을 간파, 이런 말을 했다.
“왕자가 커서 성안에 머물면 세계를 통일할 왕이 될 것이고 만약 출가(出家)를 한다면 세상을 구해낼 부처가 될 것이다.” ― 라고. 태자는 7세 때 문무를 익히면서 남다른 지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자의 얼굴엔 날이 갈수록 우수(憂愁)가 짙게 드리우며 웃음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일찍 여윈 생모(王妃)의 죽음에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그리고 미물은 조류들에게 왜 잡혀 먹어야 하며 성(盛)했다가 쇠(衰)하는 이치는 무엇인가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29세에 아들 ‘나후라(羅嗅羅)’를 낳고 ‘잔타카’의 호화생활을 외면, 백마를 타고 가출을 감행한다. 이때 악마가 뒤따라 와서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유혹을 했다. “궁전으로 돌아가라, 때를 기다리는 게 좋다. 이 세상은 모두 네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태자는 단호하게 외쳤다. “악마여! 물러서라! 내가 바라는 것은 세속의 영화 따위가 아니다”라고 호통을 쳐 악마를 따돌린 끝에 수행 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바카바’ 선인(仙人)을 찾아가 구도의 실체를 지켜보고 다음은 ‘아리타’, ‘카리마’, ‘우트라카’, ‘라미푸트라’를 차례로 방문, 수행대열에 섰다. 하지만 태자는 자신이 갈 길이 따로 있다고 판단, ‘마카타’ 굴을 거쳐 가야 도시를 감싸고 있는 숲속으로 들어가 깊은 명상에 빠졌다. 그 고행은 장장 6년, 그러나 여기에서도 각(覺)을 얻지 못하고 딴 길을 택한다. 이때 건강을 해쳐 ‘나이란지나’ 강물에 몸을 씻고 처녀(일설에는 창녀), ‘스자타’가 바치는 우유를 먹고 건강을 되찾았다.
이를 지켜 본 5인의 제자는 태자의 타락을 규탄하며 떨어져 나가 외톨이가 되어 버렸다. 이어 그는 보리수나무 밑에 앉아 목숨을 건 마지막 명상에 들어갔다. 살갗이 찢기고 뼈가 삭아 문드러지는 고투 끝에 새벽 별을 바라보고 그는 득도를 했다. 마음이 고요해지며 깨달음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그때 태자 나이 35세, 12월 8일 새벽일이었다.
석가는 東으로 가다
인도가 불교의 발상지라곤 하나 뉴델리, 캘커타, 봄베이 등 대도시 어디엘 가도 인도 승려는 찾아보기 힘들다. 석가의 誕辰地는 오늘날 네팔의 영토로 되어 있고 4대 성지에서 힌두교가 판을 친다. 석가의 고향 ‘룸비니’와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 처음 진리를 설교했다는 ‘사르나트’, 석가가 입적(入寂)한 ‘쿠시나가르’ 등 어디엘 가 봐도 그 모양이다.
성지를 찾는 것은 한국, 일본, 태국, 동남아에서 온 순례자이거나 승려들이다. 필자는 지난 93년 ‘인도문화기행’ 신문연재를 위해 1개월간 그곳에 머물며 불교성지를 돌아본 일이 있다. 그곳에는 석가의 발자취와 문화유적들이 빛을 발하고 있지만 인도정부에선 불교진흥이라거나 유적보존보다는 관광수입에 더 열을 올리고 있는 듯 했다.
보리수나무 밑에서 득도했다는 현장, 그리고 불교박물관 ‘바하보디대탑’, 세계최초의 대학(나아란다), ‘룸비니’의 ‘카비라성’ 등은 옛일을 증언하고 있지만 불교는 이곳에 머물지 않고 먼 길을 떠난 지 오래다. 인도 → 중국 → 한반도 → 일본으로 들어갔고 또한 한 갈래는 동남아(태국, 마라이, 캄보디아, 스리랑카) 등으로 유입, 꽃을 피웠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중국 - 한반도 - 일본으로 유입한 것은 대승(大乘)불교이며 동남아로 들어간 지류는 소승(小乘)불교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고구려 372년 소수림왕 2년, 북중국의 ‘전진’에서 ‘부견왕’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경전을 보내왔다. 2년 뒤 다시 중국에서 아도(阿道)가 왔으며 이를 계기로 ‘성문사’를 세웠으며 이것이 한국불교의 시원이다. 고구려의 고승 혜자(惠滋), 담징(曇徵), 혜편(惠便) 등은 일본으로 건너가 불법을 전했다. 하지만 백제도 고구려를 거쳐 불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하는 이가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받아들인 게 확실하고 백제는 384년 침류왕 1년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서해 바다를 건너 상륙하면서부터였다. 마라난타는 백제에 들어온 직후 절을 짓고 승려를 양성했으며 성왕 때는 일본에 백제불교를 전했다. 그리고 30대 무왕은 전라북도 익산(益山)에 ‘미륵사’를 창건했는데 지금도 그 절터에는 동탑, 서탑이 재건되어 옛 백제의 불교를 말해 주고 있다. 특히 겸익(謙益)은 인도 유학을 다녀와 경전을 번역,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가 되었으며 ‘담혜’, ‘관륵’, ‘도장’, ‘법명’ 등 수많은 승려들이 일본에 영향을 끼쳤다.
신라는 지리적 여건도 있고 보수파들의 반대로 삼국 중 가장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탓에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서 약 100년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삼국을 통일한 신라로선 불교가 지니는 도도한 새 물결을 수용하고 또 그것을 완성시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 진흥왕은 인도에 국비유학생을 보내고 ‘황룡사’와 ‘흥륜사’의 창건 등 불교문화 진흥에 힘을 썼다. 그 바람에 신라는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같은 고승을 배출, 불교문화 완성에 진력했다.
불교는 人本主義
불교가 여타종교와 다른 점은 신본위(神本位)가 아니라 인본위(人本位)라는 점이다. 다른 종교에선 신은 절대자요, 신도는 종속임을 강조함으로 절대자[神]는 주체(主體)이고, 신도는 피동(被動)이라는 인상을 주어왔다. 하지만 불교는 다르다. 누구든 수행(修行) 득도하면 부처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부처는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는 논리로 일관해왔다.
그래서 ‘고티마붓타’를 ‘깨달은 자(覺者)’라고도 하고 불교를 ‘각교(覺敎)’라 일컬으며 불전(佛典)을 ‘인본주의’의 근거로 삼고 그 무궁무량한 세계를 향해 수행을 한다. 불가에선 ‘성취’,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부처와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대승(大乘)적 견지에서 이어온 종교라는데 우리는 주목한다. 뿐만 아니라 교리(敎理)나 포교 그 자체가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것이 아니라 인본(人本)과 현실에 두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경탄을 한다.
불교에서 수행하고 소화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며 첫째는 연기(緣起)론이다. 이는 시간적으로 끊어버린 ‘무상(無常)’과 공간적으로 이어 놓은 ‘연기’ 등이 공(空)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말한다. 그 다음은 ‘깨달음’, ‘자비(慈悲)’와 ‘무아(無我)’를 말하고 마지막은 ‘해탈(解脫)’과 ‘열반(nirvana)’으로 완성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있는 듯 없는 듯’, ‘빈손에서 빈손으로’ 등의 대목에선 ‘따분하다’ 또는 ‘니힐니즘(nihilism-허무주의)’을 느낀다고 초심자는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자대비(大慈大悲) 그 무한한 가르침 앞에 우리 중생들은 한 번쯤 귀 기울여 볼 계절임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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