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작품은 동화적 색채가 강한 짤막한 단편으로, 세상은 악으로 가득찬 동리만은 아니고 그래도 가난 속에도 사랑을 꽃피울 줄 아는, 에덴으로 가기 위한 신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보고 있는 작품이다.
전제와 가난과 질병과 전쟁은 짜르(황제)체제 하의 러시아제정의 비극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까지도 인류가 안고 있는 비극이라 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그의 끝없는 고뇌는 궁극적으로 자기완성을 통한 무저항의 종교적 인생관을 정립하기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전제와 가난과 질병과 전쟁을 민주와 풍요와 건강과 평화로 바꾸는데 성공한 지구상에 몇 안 되는 국가 가운데 하나로 서 있는 것이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위대한 한국인이라고 불러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또한 단순한 물질적인 힘만이 아니라 창조의 정신으로 달려온 정신적 역량의 결실이라는 점을 상기해야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제기하고 있는 양극화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봐야할 것이다. 단순한 물질적 보완만으로 양극화의 문제는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정신적인 역량을 창출하는 보이지 않는 힘, 그것은 인간성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양극화의 문제를 가장 극적으로 해결해보려고 시도했던 사람은 칼 마르크스였다. 부익부 빈익빈이 가져오는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려고 시도했으나, 얼마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비판 철학가인 하버마스가 선언한 것처럼 마르크스 이론은 실패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공룡처럼 거대한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만을 남겨 놓고, 마르크스의 예언은 정반대로 흘러갔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같은 계열의 비판 철학가인 마르쿠제는, 가난의 극복,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서 색깔 논쟁이란 얼마나 필요없는 상기(想起)적인 난센스인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한 총체적인 도덕적 성찰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제아무리 유능한 정부가 들어서서 사회적인 약자를 위한 안전망을 철저하게 갖춘다하더라도, 도덕적 성찰 없이는 실효를 거둘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블란샤드(B. Blanshard)의 말처럼 모든 정치는 종국에 가서는 윤리의 문제요 도덕의 문제로 귀착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물질의 힘보다 더 위대한 정신적인 힘의 원리를 개발해야할 당위 앞에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우리는 다같이 한번쯤은 물어봐야할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빵으로만, 물질로만 살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도덕이란 마음의 덕이며, 곧 사랑이다. 악에 대한 무저항 정신은 악을 선으로 바꾸게 하는 힘을 가진 사랑이며, 동시에 용기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소유에 대한 불만족보다도, 도덕적 자괴심에서 오는 사회 통합 능력의 취약성에 대한 아픔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각자가 역사의 방관자가 아닌 주인의 자리로 돌아와서, 무엇을 하든지 동시대의 숨결을 같이 들을 수 있는 진정한 사명과 자각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언어를 갖고 싶다.
우리 다 같이 맑은 양심과 깨끗한 사랑을 일궈내어 이 땅을 밝히려고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 고뇌에 찬 양극화 문제도 우리들의 품속에서 봄눈 녹듯이 사그라질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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