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누아르의 탄생
강렬한 연기 여운 남아
썩 괜찮은 누아르 한 편이
‘사생결단’의 세계엔 착함이 존재할 구석도 없고, 승자가 서있을 자리도 없는 파괴된 운명의 패배자들만 득실거린다. 최호 감독이 발품을 팔아 취재한 현장감은 현실성을 한층 밀어붙인다. 우리 사회의 뒷골목을 생생하게 드러낸 시나리오와 누아르라는 스타일의 세련된 결합이란 점에서 ‘사생결단’은 한국형 누아르의 탄생 또는 재발견이란 희망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마약 판매상 상도(류승범)는 어렸을 적 마약 제조자였던 삼촌(김희라) 때문에 어머니를 잃고, 먹고 살기 위해 마약을 판다. 도 경장(황정민)은 거물급 마약책 장철(이도경)을 잡으려다 선배를 잃고, 선배의 부인을 책임지며 살아가고 있다. 도 경장은 상도를 미끼로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둘은 각자 살아남기 위해, 필요에 의해, 서로를 파는 악어와 악어새에 필적할 비정한 관계다.
상도는 도 경장 앞에서 속말로 다짐한다. “한 몫 단단히 잡아가, 세금 내고 장사하는 데로 가는 기야. 징글징글한 바다를 뜨는 기야.” 도 경장은 그런 상도에게 말을 건넨다. “니 회전목마 알제? 빙글빙글 도는…. 그 회전목마 타며는 끝날 때까지 못 내린다. 글마하고 내는 인즉도 같은 회전목마에 타고 있다 아이가.”
영화는 날 것 그대로의 리얼리즘에 가깝다. 어느 것 하나 살아서 펄떡거리지 않는 게 없다. 내지르고 발산하는 데 집중한 화술 때문에 모두가 즐기기엔 지나치게 빡빡하다. 섹스 마약 폭력 장면에선 처절하리만큼 강도 높은 묘사로 일관한다. 에너지 과잉의 센 이미지들과 악다구니의 향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배우들의 연기도 뚝뚝 묻어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주인공 상환의 10년 뒤 모습을 그려내는 듯한 류승범은 강렬하고 순발력 뛰어난 연기로 하나의 정점에 도달했다. 어떤 배역을 맡아도 온전히 체온을 돌게 하는 황정민은 어눌한 듯 하면서도 독한,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을 입체적으로 살려낸다. 감독은 촬영의 각도에서 편집의 리듬까지 화려한 스타일로 두 배우의 연기에 날개를 달아줬다.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소화해낸 장철 역의 이도경, 오랜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김희라의 연기는 영화를 튼실하게 뒷받침해준다. 발견이라고 해도 아깝지 않을 추자연의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도 좋다.
차가운 전율을 일으키는 라스트 신은 관객의 슬픔과 분노, 마음을 저당 잡히게 할 정도로 강렬하다.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 강렬함은 더욱 크다. 18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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