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회담 반세기 불구 긴장관계 여전히 지속
강대국 갈등·전쟁속 중립 지켜온 ‘스위스’
한반도 평화위해 화합·방위력 등 본받아야
지난 한주, 우리 앞에 전개된 사태 앞에 분노와 아쉬움 그리
그 다음은 남북 장관회담에서 함경북도 단천(端川)의 광산 공동개발과 항강 하구(河口) 자갈, 모래 공동채취를 제의해 북측반응이 관심을 모았다.
이밖에도 DJ의 6월 방북여부가 관심사였다. 뿐만 아니라 5·31 지방선거 전초전에서 금품거래(공천)가 드러나 국민들은 더 없이 우울한 표정들이다.
평양에서 열린 장관회담
경제대국(세계 2위) 일본이 미국과 밀착, 군사력을 키워오더니 이젠 패권주의 가도를 보란 듯이 달리고 있다. 우리와는 ‘남(南)의 삼방’이라 해서 한 동안 평온을 유지해왔으나 돌연 팽창주의 근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북으로는 러시아의 쿠릴열도(3개 섬) 반환요구, 우리 동해에선 독도영유권 주장, 동지나해에선 조어도(그들은 센가쿠 열도라 함)를 먹겠다고 중국과 갈등을 빚어왔다. 독도문제를 놓고는 한·일 두 영수 간에도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는 것이라며 노무현 대통령이 과거 일본의 죄악사를 낱낱이 지적하자 일본 나카소네 총리는 역사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현실 문제를 논하자며 정상회담을 들고 나왔다. 그 시각 평양의 남북 간 장관회의에선 우리 측 이종석 장관이 북측이 통 크게 응해 온다면 상응한 경제협력을 하겠다고 제의했는데 그 결과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남북회담은 반세기 동안 우여곡절을 겪어왔음에도 난제가 쌓여 앞날을 예단하기 어렵다. 화해 쪽으로 가고 있다고는 하나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게 남북관계라 할 수 있다. 상대를 설득시키는 일도 어렵거니와 국민여론을 수렴하는데도 어려움이 뒤따른다. “왜! 턱없이 퍼다 주느냐?”는 불만에서부터 국민동의와 투명성 같은 걸 요구하기 때문에 늘 시끄럽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옛날의 반공법) 개정논란, 주적(主敵)개념의 한계 등 공방은 줄곧 봇물을 이뤘다.
지난 70년대부터 DJ는 소련, 중국(북측 후원국)과 남의 3방 중 미국과 일본 등 관련국 보장 하에 한반도 중립화를 주장해왔다. 그것이 구도(構圖)나 역학(地政學) 앞에 대안(代案)일 수는 있고 논리상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次善)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힘에 의한 흡수 통일보다 더 수순이 복잡하다며 비관하는 이가 없지 않았다.
한 시대 우리는 남북통일을 이루려면 그 ‘모델’을 독일에서 찾아야한다고 흥분한 때가 있었다. 그것이 오늘에 와선 궤도(軌道)수정이 불가피해지면서 공존 쪽으로 가닥을 잡아 나가고 있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 서독이 동독과 달러로 통일을 이룬 결과 어떻게 되어있는가. 동독은 여전히 뒤져 있고 서독은 침체의 늪에서 빈혈을 체험하고 있다. 그 교훈에 근거한다면 2만 달러 미만의 우리의 경제로는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다.
중립은 쉬운 길인가
한반도 중립화를 생각하는 정치인들은 아마도 ‘스위스’를 모델로 삼아왔을 게 분명한데 그렇다면 우리의 중립은 어떤 형태의 것이라야 하는가. 중립이란 전쟁이나 갈등 따위와 상관없이 ‘유아독존’ 편하게 살아가는 터전만을 생각할지 모른다.
동·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질 않고 편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미덕일 수 있다. 하지만 중립을 구축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완충(緩衝)을 정치용어로는 노맨스랜드(no-mans-land)라 부르지만 이는 결코 낭만스런 어휘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완충이란 동서 또는 흑과 백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 ‘제3지대’, ‘중립’, ‘로터리 구실’ 때론 견제능력을 지녀야 제몫을 할 수 있다. 그래야 마주보고 달려오던 차량들이 ‘로터리’에서 충돌하질 않고 방향을 바꿔 순환하는 그 기능….
세인들은 스위스하면 턱없이 잘사는 나라(3만5000달러), 전쟁을 모르는 시민, 알프스 영봉과 아름다운 호수, 감칠맛 나는 요들송, 시계의 종주국, 은행사업이 잘되는 곳, 전범, 도망자도 받아주는 지상천국쯤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겉으로 풍기는 이미지는 일응 그러할지 모른다.
하지만 스위스는 천혜, 천부(天惠, 天賦)의 터전, 그야말로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 그들 역시 온갖 난관을 초극, 세상이 부러워하는 대국을 개척한 것이다. 그러니 스위스야말로 ‘작으면서 큰 나라’다. 세상에는 크면서도 작은 나라가 있는데 예를 들면 아프리카, 아프칸, 몽고, 티벳 등은 ‘크지만 작은 나라’요, 후진국이다.
스위스는 인구 700만에 비록 영토는 좁지만 아주 큰 나라요, 일등국으로 그들의 긍지(콧대)도 대단하려니와 의지 또한 강직해서 역대 로마교황의 근위병과 외국용병은 스위스출신이 단연 으뜸이라 했다. 혹자는 이 나라가 태초부터 전쟁이나 군주(君主) 따위는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이가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들의 역사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이어 알프스 빙하지대 동굴과 바위 등에서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BC 5세기 경 켈트인이 들어와 살았고 라인강 쪽의 게르만인과 자주 싸우다 나중에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하며 그 영향권에 들어갔다.
이어 4세기경에는 기독교가 들어왔고 5세기에 들어 전쟁과 각 부족 간에 반목을 해오다 10~11세기에 신성로마제국의 날개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루돌프 1세가 죽은 후 합스부르크가의 학정에 농민들의 저항이 극에 달했다. 이에 대해 훗날 ‘스위스인’들은 ‘윌리엄 텔’의 신화를 만들어냈지만 이 이야기는 정사(正史)가 아니라 전설이라고 했다. 우리의 ‘홍길동’처럼…. 스위스가 영세 중립(永世中立)을 획득한 것은 1815년 오스트리아 비인회의 결과였으며 이 때 영토를 22개주(칸톤)로 못을 박았다.
스위스의 중립은 이렇듯 누가 가져다 준 게 아니라 이를 쟁취(개척)했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2차 대전 때 ‘히틀러’도 감히 넘보지 못했던 스위스는 방어체계가 대단해서 이 나라가 영세중립을 포기한 것은 1986년 구소련과 동구권 공산당이 붕괴하면서 취해진 조치였다
완충도 자위능력 있어야
한때 국토확장의 꿈을 갖고 주변국과 전쟁을 치른 일까지 있으나 프랑스와의 대결에서 패하자 1515년 한계를 느끼고 중립을 선언했다. 갈등과 전쟁으로 인류사가 얼룩졌던 20세기 스위스는 용케도 그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오늘에 큰 기침을 하고 있다.
강대국들이 맞붙어 싸웠던 1, 2차 세계대전과 지역분쟁 와중에서 중재자 위치를 지켜온 바람에 수많은 사상가, 예술인, 전쟁피해자, 양민 등의 피란처(구제지역)로 큰 몫을 해냈다. 20세기 그 혼란의 와중에 스위스로 망명을 했거나 은신한 면면을 살펴본다.
아나키스트인 ‘바쿠닌’을 비롯 이태리의 논객 ‘가리발디와 마니찌’, 상대성원리로 유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 러시아의 철학자 ‘알렉산더 체르첸느’, 문인으로는 ‘헤르만 헤세’와 소설가 ‘토마스만’, 시인 ‘바이런’ 역시 시인인 ‘제임스 조이스트’ 등이 스위스에 머물렀다. 이밖에도 레닌은 10월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키기 전 ‘취리히’에서 욕망을 가다듬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나라에는 80년대 중반까지 우리 국군 특무대장을 지낸 김창룡의 유족들이 살고 있었다. 스위스는 관광대국이지만 은행운영 역시 그 누구도 추종을 불허한다는 여론이다.
가장 안전하고 믿을만하다 해서 세계의 부호, 정치인, 망명객들은 스위스은행을 이용했고 필리핀의 마르코스 전 대통령부처, 중동의 정치인 심지어 지난날 한국정치지도자와 기업인, 평양지도자의 계좌까지 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어떻든 스위스에 머물다보면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5·31地選 지역갈등 없어야
우리는 5·31에 지방장관, 시장, 군수와 지방의원들을 뽑는 이른바 지방분권 시대를 내손으로 열어야 할 입장이다.
사람마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외쳐왔으나 선진의 경우는 어떠한가. 미국, 일본, EU 등 여러 선진국이 있지만 내친김에 스위스를 챙겨보기로 한다. 이 나라는 지방분권이 잘되어 있어 지방(州)은 크고 중앙은 작기로 유명한데 22개 주를 장악하는 중앙(베론)에선 우리처럼 하향식(下向式)으로 내리 미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가끔 연락병처럼 중앙관리가 출장형식으로 주정부를 찾아와 실태를 파악하는 정도라면 거짓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들에게 “당신네 수도(首都)가 어디냐?”고 물으면 ‘제네바’, ‘베론’, ‘취리히’, ‘루가노’라고 들쑥날쑥 식의 대답을 한다. 그것이 무리가 아니다. 중앙개념이 없는데다 주(州), 정부와 매사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위스는 언어에 있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태리어권으로 나뉘어져 세금을 받는데도 통역을 앞세우는 경우가 있다. 종교도 가톨릭 47%, 기독교 44%, 그리스 정교 등이 섞여 있으나 신앙의 자유를 누린다.
여기서 우리와 다른 점을 든다면 지역감정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간 동서간의 갈등, 영호남의 감정대립으로 스스로를 괴롭혀 왔음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또, 그들은 혼성국민인데도 화합하는 데는 천재적 기질을 발휘한다.
옛날 어느 철인은 “야만인으로 태어나질 않고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을 운명의 신에게 감사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듯 그들은 민족은 없으나 스위스 국민의 자부심으로 뭉쳐 있다는 사실이다. 단일민족이라면서도 동네 간에, 종친끼리, 지역 간에 반목하고 갈등을 갖는 우리 현실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15세기경 스위스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학정에 항거한 그 역사를 ‘윌리엄 텔’ 이야기로 분장한 것에 대해 나무라는 일이 없다. ‘케슬러’에 항거하다 밉보여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화살로 쏘아 맞추고 사면되어 아들을 안고 자유천지를 찾아갔다는 ‘윌리엄 텔’…. 이는 건국신화라 했다. 전설에 속하는 이야기지만 이를 실체로 받아들이는 ‘스위스인’들이다. 단군(檀君)을 우상(偶像)이라 몰아대어 전각도 못 짓게 하는 우리와는 다른 풍토임에 틀림없다. 22개 혼성시민이 모여 일으킨 스위스는 거듭 말해 ‘작지만 대국’임을 실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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