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택 시인 대전충남작가회원 |
바람. 역경에도 꺼지지 않는 열정 ‘교훈’
지난달 25일 태안의 신두리 사구(砂丘)에 30여명의 작가들이 모였다. 볕도 따스하고 좋아 잔뜩 달아오른 꽃망울이 터진 먼 산으로 산행을 갈까하다가 함께 동행을 하게 되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첫발을 내디딘 땅, 신두리 사구는 생각만큼 황량했다. 일행들을 괴롭힌 것은 비릿한 갯내와 세찬 바람, 비명을 지르며 드러눕는 마른 풀들의 울음소리 뿐이었다.
특별한 계획이 없으면 웬만해선 올 수 없는 신두리 사구로 방향을 튼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중도일보사’와 ‘시와 정신’이 주최하는 ‘시인 작가와 함께 하는 문학기행’ 이 그것이다. 누런빛과 잿빛이 교차되는 황량한 지역으로 장소를 잡은 것은 아마 갈수록 험난해지는 문학의 역경을 감내하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막상 도착해 보니 꽤나 멀었다. 대전에서 9시쯤 출발하여 12시쯤 태안에 닿았으니 3시간을 길 위에서 보낸 셈이다. 또 태안에서 신두리 사구까지 40여분, 특별히 초청된 작가들의 문학 강연을 듣는 시간까지 합쳐 왕복을 따진다면 현장에서 체험을 한 것은 불과 몇 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신두리 사구를 한번 밟게 된 것으로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것뿐이 아니다. 신두리 사구로 떠나기 전 태안문화원에서 열린 초청 작가들의 문학 강연 역시 영원히 머릿속에 넣어둘 만큼 알차고 소중한 내용들이다. 김완하 시인의 인사말과 함께 등단한 3명의 작가들의 강연은 시작될 때부터 아예 신두리 사구를 문학의 향기로 꽃 피웠다. 고(故) 임영조 시인의 문학을 회고한 나태주시인, 명천 이문구의 생전의 삶을 절절히 묘사한 안학수 시인, ‘태안문학’을 소개한 지요하 소설가의 강연은 점심으로 해치운 뼈다귀탕 만큼이나 구수했다.
특히 신두리 사구의 생태계와 보존가치에 대해 열변을 토한 환경운동가 임효상 씨의 강연에 내 마음이 흠뻑 빠져들었다. 신두리 사구를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는 그의 강연을 듣다보니 언젠가 영화에서 본 듯한 사바나의 광활한 사구가 문득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문학 강연을 끝내고 곧장 달려온 신두리 사구, 직접 온몸으로 부딪쳐 체험하니 더 실감이 났다.
신두리사구는 길이 3.4㎞, 폭 1.3㎞, 면적 9만8953㎡에 걸쳐 수 십 종의 희귀동식물이 함께 숨을 쉬며 살아가는 생태계의 보고다. 세찬 바람에 드러눕는 마른 풀들과 바람과 파도의 합작품으로 만들어진 모래언덕, 저 멀리 하늘과 조우한 잉크빛 바다가 숨을 멎게 했다. 좀체 생명이라곤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사구지만 그 곳에 갯방풍, 갯매꽃, 통보리사초, 겹달맞이꽃의 군락지와 멧꿩, 개개비, 개미귀신 등의 서식지가 있다.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코를 찌르던 비릿한 갯내음은 세찬 바람에 섞여 멈추지 않았다. 바람이 얼마나 센지 똑바로 서 있을 수 없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생명들이 아무 탈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신기했다.
잠시 머물렀다 떠난 문학 기행이었지만 자연으로부터 배운 것이 있다. 신두리 사구가 일행에게 뜻 깊은 교훈을 전해 준 것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물결 무늬같은 섬세한 시들이 새겨졌으면 하는 바람과 역경이 몰아쳐도 시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그것이다. 봄꽃 너울대는 춘삼월, 꽃망울 터지는 봄길 따라 신두리 사구 까지 참 잘 달려왔다 싶었다. 신두리 사구를 빠져나올 무렵, 힘없이 내려앉는 일몰의 햇살이 산수유꽃처럼 바다를 노랗게 물들였다. 해당화 필 때 다시 오라고, 다시 오라고, 바다가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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