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이 법이라고 하면 다소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엄연히 계약은 법이다. 법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구속성이나 강제성이라고 한다면, 계약도 이런 특성을 다 갖추고 있다. 당사자들이 스스로 법적인 구속을 받기로 결정함으로써 계약은 구속력을 얻는다. 개인과 개인의 약속을 계약이라고 한다면, 법은 국민다수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적 인식과는 다를지 모르겠으나, 계약의 영역에 들어가면 계약이 오히려 법률보다 우위에 서 있다. 법이란 다만 계약에서의 규율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경우에 보충적으로 후견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나 계약이 정의와 형평에 어긋난다면 그 법적 지위와 효력을 인정받을 수 없는데, 이는 법률이 헌법적 가치에 어긋날 때 그 효력을 잃는 것과도 같이 볼 수 있을 것이다.
법이 지켜져야 하듯,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d servanda). 이 로마 법언은 법과대학에서 법률공부를 시작하면서 최초로 접하게 되는 법의 원리이다. 계약이 ‘법’ 대접을 받는 것은 바로 자기구속과 자기결정에 기인하는 것이고, 이처럼 자기결정이 구속력을 발휘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서 파생되는 상호존중의 가치에 바탕한 것이다.
독일의 대표적인 민법학자 칼 라렌츠(Karl Larenz)는 그의 저서 ‘정당한 법 - 법윤리 요강’에서 상호존중의 기본원리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예로 들고 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고도에 고립되어 오랫동안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경우, 이들 관계를 두 가지 형태로 상정했는데, 하나는 강자가 약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약자를 자신의 지배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동등의 기초 위에서 각자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서로 타협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상호존중의 정신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후자의 경우다. 전자의 경우 공정과 정의에 바탕한 계약이 성립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호존중의 정신이야말로 건전한 법 생활문화를 조성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전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상호존중의 원리는 헌법상 인간의 존엄과 가치로 표현되어 있고, 이는 전 법질서를 관통하면서 한편 계약의 존재근거가 된다. 내가 다른 사람과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그 타인의 의사에 나의 의사와 마찬가지의 효력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계약이 실제 생활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비중이 매우 큼에도, 사람들이 ‘계약’을 대하는 태도는 몹시 허술한 것 같다. 우리의 법생활 현실에서는 과연 양자 사이에 의사의 합치가 존재하는지, 의사의 합치가 있다면 누구와 누구 사이에 이루어진 것인지, 또 어떤 내용의 계약인지와 같은 계약의 존재와 내용을 둘러싼 무수한 법적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증서가 없는 계약은 경솔해질 수 있고, 사후적으로도 입증이 곤란해지므로, 중요한 거래, 고액의 거래에 있어서는 후일 분쟁 방지를 위해 반드시 서면으로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건전한 계약문화의 확립은 바로 선진 법문화를 재단하는 중요한 징표라 할 수 있다. 계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하여 앞으로 계약체결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해 둔다면, 그에 따른 분쟁을 미리 예방함으로써 당사자의 시간, 돈 등 사회적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고, 인간관계의 파탄도 막을 수 있으며, 날로 과중해지고 있는 법원의 업무부담도 크게 줄어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법의 날을 맞아 법치주의와 법의 생활화가 제대로 정착하기 위하여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본다.
첫째는 계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중·고교, 대학에서 기본적인 사회교육으로 충분히 이뤄져야 하며, 국민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법원이 생생한 법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둘째는 법원이나 어느 국가기관이 맡든 기본적인 계약서 양식을 유형별로 다양하게 비치해 두는 것이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는 친근한 자세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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