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가 향기!"
"틀렸어. 똥 향기!"
아이들이 모두 까르륵거렸다. 함께 가던 엄마도 함박만하게 따라 웃는다. 시루봉 가는 길, 복사꽃이 한창인 복숭아밭 이랑을 지나치다가 만난 아지랑이 같은 웃음이었다. 엄마와 딸들의 대화 중에 터뜨려진 구김살 없는 웃음에서 나는 어떤 터뷰를 깨뜨렸을 때의 후련함이 느껴졌다.
방송자막에서 '똥'보다 '변' 해야 하고 혹시 누가 무심코 똥이라고 내뱉으면 대번에, 아니면 거의 의도적으로 '삐'라는 신호음과, 거의 의식적인 빨간 ×자로 대신하는 것만 보아 오다가 모처럼 이런 거침없는 대화를 들으니 신선하기까지 했다.
우리 옛말을 따져보면 입은 '앞'이고 항문은 '뒤', 다시 뒤가 변해 똥이 된다(아, 편의상 지금부터 똥에 인용부호를 찍지 않겠다). 저절로 멍멍 짖어서 개가 아니듯 본질이 더러워서 똥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언젠가 서울랜드에서 「똥의 재발견」이라는 이색 전시회가 열렸었다. 그 전시회장에 중국인마을 입구의 패루(牌樓)처럼, 아니 우리 옛날 장승이나 솟대처럼 위용 좋게 우뚝 선 똥 모양의 캐릭터를 본 적이 있다. 그뿐인가. 밟으면 질펀한 체험관과 무게 측정하는 곳이 있었고, 각종 동물의 굳은 배설물과 호랑이똥 말똥으로 만든 종이도 진열해 놓고 있었다.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발상 자체도 그렇고, 우리가 아침마다 보는 그게 하필 탐험이나 탐방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 못해 봤기 때문이다. 그걸 아까워하던 옛 어른들은 마을 갔다가도 뒤가 마려우면 이왕이면 자기 집 거름 만들자고 재빨리 돌아오곤 했다. 이런 어른들이 봤으면 세상 말세라고 혀를 끌끌 차며 핀잔이라도 줬을 일이다.
이렇게 전시회까지 열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우리가 똥과 일정한 거리감을 느끼고 산다는 증거일 터이니, 우리 속담도 이를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가령, 똥 뀐 놈이 성낸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하는 것들은 고전에 속하고, 요즘같이 어려울 때는 '적게 먹고 가늘게 똥 눈다'는 말이 제격일 것이다.
또 생각해 보자. 길가에 뒷간을 만들어 놓고 퇴비로 만든 시절에는 광우병도 없었고 환경오염이라는 말도 쓰지 않았다. 제발 그때야 문명이 없었고 개발하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고 항변하지 말자.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똥을 친근하게 여긴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재활용을 하게 하는 어떤 동인(動因)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우리 신화에도 이런 것이 있다. 장길손이라는(장길산이 아님에 유의) 굉장히 큰 거인이 배탈이 난 나머지 토했는데 백두산이 되었다. 세상에! 우리나라 삼천리강산의 백두산이 그렇게 만들어진 똥덩어리였다니!
조금만 더 보자. 황금과 색깔이 비슷한데서 나온 유추로 여겨지지만 꿈에 똥을 보면 부자가 될 상이라 했다. 실제로 내가 아는 어떤 복된 여자분도 꿈에 이걸 보고 나서 복권에 당첨된 적이 있다 한다. 지금 필자 가족과 아주 가깝게 지내고 있으니 원한다면 증언을 요청해도 좋다. 복권 같은 행운이 없던 시절, 이걸 밟거나 옷에 묻는 꿈을 꾸면 공술 생긴다고 좋아라 했던 순박한 우리 조상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전쟁이 더럽힌 우리 국토를 똥땅(糞地·분지)으로 빗댄 작품이 있었고, 현대인의 자아분열적 상황을 똥으로 표현한 정말 똥 같은 연극도 있었다. 하기야 모차르트도 만년에 "똥을 끼얹어 주겠다"라는 가사가 들어간 캐논을 몇 곡 쓴 일이 있다. 이걸 보고 똥, 방귀 같은 것은 모차르트 일가의 일상용어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하여튼 이쯤이라면 똥은 혼돈에서 질서로 가는 매개물로 삼을 만하는 생각이다.
이렇게 가까운 똥을 놔두고 인분(人糞)을 쓰는 것은 머리나 나이보다 두상(頭上)이나 연세(年歲)를 고결히 여기는 한자 우월 사상의 한 편린이다.
이걸 언제까지 똥 마려운 계집 국거리 썰 듯 얼렁뚱땅 덮어둘 것인지, 왜 강아지똥은 괜찮고 사람똥은 안 되는지, 지금부터 당장 무제한으로 쓰자는 말은 아니나, 이제 대명천지에 방송용어, 신문용어라는 이름으로, 더러는 언어적 관념주의자들에 의해 족쇄가 채워진 똥을 신중하게 복권시켜 줄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흘러야 할 것을 흘러가지 않게 하면 체하고, 똥을 시원하게 못 누면 변비에 걸린다. 같은 말이라도 막상 문자나 문장으로 표현했을 때는 달라지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필자로서, '천한' 분뇨담이 글의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딱하다. 똥이여! 똥을 똥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슬픈 현실이여!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길동'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경직된 엄숙주의의 숲에서 개나리, 진달래, 홍매화와 어우러진 진짜 향기를 오랜만에 맡고 왔다. 그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에 머리가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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