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살정책으로 충남 2곳 명맥만 유지
지역대표 ‘중앙시장’ 6·25때 피란민이 형성
대형할인점 등 위세에 위축… 활성화 난제
요즘 지방의 5일장엘 가보면
농촌출신이 아니더라도 옛것에 대한 추억과
아련한 향수 같은 걸 느끼게 마련이다.
그 곳은 예로부터 생필품 정도를 거래하는 장터로
서민애환은 물론 사람·땀 냄새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도시부유층, 지성 중에는 시골장터 정경을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소설에서 찾으려할지 모른다.
한때 주지주의(主知主義) 중심에 서기도 했고 ‘자연주의’ 맹장으로 활약한 바 있는 이효석. 그는 유진오와 함께
소설 줄거리는 이렇다. 강원도 평창 재래장터에서 벌어진 두 장돌뱅이 이야기를 엮은 작품이다. 장꾼은 뜸하고 석양(夕陽)판인데 옆에 퍼져 있는 당나귀를 쳐다보니 닳아빠진 발굽에 목털까지 변색해 있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당나귀와 함께 늙어 온 장돌뱅이였다.
헌데 바로 옆에 난전을 벌이고 있는 애송이 장돌뱅이에 유독 신경이 쓰인다. 고향을 묻자 그는 봉평 출신이라 했다. 늙은 장돌뱅이는 봉평 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가 젊었을때 옛날 봉평에서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올라 동네가 소금을 뿌려 놓은 듯 하얀 밤에 있었던 이야기다. 그는 물레방앗간에서 한 여인과 불똥이 튀도록 담금질을 했다.
그 후로는 이 장, 저 장을 떠돌다 보니 그녀와 만나질 못했다. 젊은 장돌뱅이의 나이와 편모이야기, 여러 정황을 듣고 보니 짚이는 게 있었다. 두 장돌뱅이는 다음번엔 봉평장에 갈 것을 약속하고 자리를 거뒀다. 이어 장터를 벗어나 개울을 건너면서 애송이가 왼손으로 채찍을 드는데 그때 늙은이 왼손에도 회초리가 들려 있더라는 소설내용이다.단편소설이지만 5일장의 이모저모를 기막히게 그려낸 작품이다.
전쟁때는 식량·무기 등 운반
조선조 초기 재래시장이 형성되자 상인과 소비자 사이를 비집고 파고든 것은 ‘보부상’이었다. 이들의 경제행위(때로는 물물교환)에 대해 세상에선 ‘봇짐장수’, 또는 ‘등짐장수’라 불렀다. 공식명칭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인데 전자는 상품을 보따리에 싸들고 다닌다 해서 ‘봇짐장수’, 후자는 지게에 짊어지고 다닌다해서 ‘등짐장수’라 했다. 이들은 대개 하루에 왕래할 수 있는 근거리 작은 장터를 누비고 다녔지만 대상(大商)들은 배를 이용하거나 우마차를 통해 대량의 상품을 유통시키기도 했다.
‘보부상’이 조직적으로 활약한 시기를 조선조 초기라 짐작할 뿐 정확한 기록은 없는 듯싶다. 다만 보부상과 유사한 ‘거간’ 활동 같은 건 이미 삼국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초 ‘보상’인 ‘봇짐장수’와 ‘부상’인 ‘등짐장수’는 별개의 행상이던 것을 구한말에 조정의상리국(商理局)이 이를 통제했고 부상을 좌단(左團), 보상은 우단(右團)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조정이 이들에게 눈을 돌린것은 전국적으로 300만의 회원을 거느린 거대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정치적으로 활용가치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보부상은 임진왜란 때는 왜병과 싸우기도 했고 동학혁명 시엔 조정 편에 서서 녹두장군과 싸웠다. 그들은 조정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대신 유사시엔 조정에 충성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전통을 다져왔다. 임진란과 병자호란 때는 식량과 무기 같은 걸 날랐고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을 물리친 바 있으며 대원군에 반기를 든 민영익은 보부상을 선동, 서울진입을 꾀한 일도 있었다. ‘봇짐장수’는 금은보화, 화장품, 인삼녹용 같은 걸 취급했기 때문에 벼슬아치의 저택을 드나들 수 있었고 궁중과도 은밀하게 연계 짓는 경우가 있었다.
이처럼 역사와 전통을 지닌 보부상이지만 일제가 들어서며 이를 말살, 그 명맥은 끊어졌다. 충남 관내엔 단 두 곳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충청우(右)도 저산 팔구 보부상단(부여, 한산, 은진 일대)과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 예산, 덕산을 중심으로 하는 보부상 집단이다. 특히 예덕상무사의 유지보존을 위해선 그 지방유지 윤규상 씨가 70년대부터 노력을 해왔으며 지금은 신평중학교에서 이것을 전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속자료는 더욱 갈고 닦아 문화유산으로 길이 간직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대전 시내 유통업계에도 변화의 물결은 출렁이고 있다. 한 때 콧대가 높다 해서 눈총을 받아온 ‘까르푸’가 두 손을 번쩍 들고 퇴장할 기미를 보인다. 백화점과 재래시장의 기 싸움 또한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지방읍면에 소재한 ‘5일장’에 이르러선 갖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옛날의 ‘5일장’엔 나름대로 낭만이 있었으며 생기가 돌았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한 가닥 향수 같은 걸 느끼며 그 때 일들을 회상한다.
재래시장의 기원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으나 원시적 형태의 것은 삼국시대부터 있어왔고 그것이 조직적으로 행해지기 시작한 건 1770~1830년대라고 알려져 있다. ‘5일장’은 19세기 초에 이르러 큰 장을 형성하자 전국적 유통망과 연결, 상업중심부로 부상을 했다. 그때의 장터로는 경기도의 사평 장, 안성의 읍내 장, 교하(交下)의 공릉 장, 충청도의 강경 장, 그리고 천안의 덕평 장, 전라도의 전주읍내 장, 강원도의 평창대화 장, 황해도 토산 장, 황주읍내 장, 평안도 진두 장, 함경도의 원산(元山 )장 등이 한 시대를 주도했다. 이후 한성(서울)에선 1905년 동대문 시장의 설립을 보았고 남대문 시장, 로시장 등이 번성, 오늘날 세계최대의 것이라 해서 외국인의 발길이 그치질 않는다. 이렇듯 개량된 재래시장은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도쿄 한복판, 우에노역(上ノ驛) 맞은 편 아메요코(アメ橫)라는 재래시장은 도쿄의 명물로 이 시장에 들어서면 인파에 밀려 물건을 놓고 흥정하기 힘들 정도로 붐빈다.
우리나라의 ‘5일장’은 15세기(조선시대) 등장설이 유력하다. 그 이전엔 ‘10일장’이었는데 보부상들이 이를 ‘5일장’으로 단축시켰다는 것이다. 이곳저곳 시장과 연결시켜 수익을 올리려면 장날이 잦아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조정에 의한 것이다. ‘5일장’은 20세기 말까지 꾸준하게 이어져 오다 도시화와 산업화, 상설시장과 더 나아가 백화점의 위세에 눌려 많이 줄어들었고 빈혈상태를
충남지방의 재래시장
백화점과 상설시장이 번성을 하자 반사적으로 ‘5일장’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버렸다. 재래시장도 이젠 상설시장과 ‘5일장’으로 분리되어 묘한 경쟁관계를 표출,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옛날엔 행상이 마을의 외딴집까지 찾아다녔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상인은 매일 자리를 옮길 필요가 없어져 버렸고 사는 사람 역시 5일간을 기다리질 않고 매일매일 필요에 따라 물건을 살 수 있다는데 상설(常設)시장이 빛을 발하고 있다. 이것은 공히 양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근대적인 상거래 구조라 할 수 있다.
대전·충남권의 대표적 재래시장과 ‘5일장’ 그리고 그곳에서 거래되는 주 상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강경장=새우젓과 젓갈류 ▲공주=밤, 인삼 ▲광천=새우젓, 김, 도자기 ▲대천=어물, 마늘 ▲당진=마늘, 오이, 뱅어포(실치) ▲금산=인삼, 고추, 한약재 ▲부여=인삼, 수박 ▲서천=모시(저마), 곡물 ▲서산=어리굴젓, 마늘, 생강 ▲삽교=딸기, 땅콩 ▲신탄진=농축산물 ▲안면=김, 생선 ▲예산=사과 ▲웅천= 마늘, 고추 ▲조치원= 북숭아, 참외 ▲천안=참외, 호두 ▲추부=인삼, 약초 ▲한산=모시, 곡물 ▲청양=버섯(표고), 구기자 ▲홍성=새우젓, 농축산물 ▲해미=채소 등의 특산물이 거래된다.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강경의 젓갈(새우젓)과 금산, 부여의 인삼, 홍성의 돼지, 닭 등 가금류, 그리고 천안의 호도와 참외, 서산의 어리굴젓과 생강, 공주의 밤(栗), 조치원의 복숭아는 인기가 높다. 금산의 인삼은 세계적인 상품으로 현재 ‘인삼 EXPO’까지 준비 중에 있다. 대전 시내에는 여러 개의 백화점 이외에 거대한 재래시장이 있으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중앙시장을 들 수 있다. 이 시장은 6·25사변 후 피란민들이 몰려 이뤄낸 시장으로 한 때는 양키시장이라 부른 때도 있으나 실제로는 서민이 즐겨 찾는 그런 시장이었다.
하지만 이 시장은 상설시장이고 ‘5일장’이 서는 곳은 ‘유성장’과 ‘신탄진장’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도 노점상들이 떼를 지어 시장을 형성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퇴미(대흥동)의 ‘금요장터’가 그것이다. 이는 ‘7일장’으로 이곳엔 따로 공간이 있는 게 아니라 보도(步道)와 건물추녀 밑을 마구 점거, 상행위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경찰이 단속했으나 상인의 조직(떼)이 커지자 아예 눈감아 주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니 통행길이 따로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장날이 되면 장터는 매우 붐빈다.
시골 장엔 浪漫이 있었다
옛날의 시골 장엔 이야기(敍事)뿐 아니라 낭만이 뒤따라 그곳엘 가보면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빈대떡에 막걸리 잔을 비우며 뱉어내는 세상이야기, 약장수의 손풍금에 ‘홍도야 울지 마라’ 간 들어진 노래 소리, 어물가게 주인의 외마디소리, 쾨쾨한 냄새와 비린내를 좇아 파리 떼가 윙윙대면 막부채로 그것을 쫓는 가계 주인이 떠오른다. 쇠스랑, 낫, 괭이 등을 내놓은 철물점을 비롯 건물추녀 밑에 멍석을 깔아 놓고 유충렬전, 심청전, 춘향전, 장화홍련전 등의 이야기책을 파는 난전책장수….
모시와 삼베, 무명, 인조 등을 파는 포목상과 나막신과 짚신, 미투리, 고무신까지 내놓은 신발가게도 신바람이 나 있었다. 장꾼들의 모양새도 여러 갈래였다. 농사지은 콩, 팥, 수수쌀을 한 자루 이고나온 아낙네와 계란꾸러미와 닭을 구럭에 챙겨 메고 나온 노인들, 어디 그 뿐인가. 장작을 지고 나와 팔아가지고 소금에 절인 고등어, 한 손을 사서 지게에 묶어 놓고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 나무꾼도 있었다. 그리고 대장장이는 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망치질을 했다.
땅거미가 질 무렵 동구 밖에 이르면 장꾼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런 정경도 찾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시골 장터는 낭만이나 향수(鄕愁) 따위 감상의 잣대로 치소금(계량, 계측)할 그런 시점이 아닌 것이다. 오늘의 5일장엔 활기가 없다. 농촌을 닮아 축 늘어져 있어 재활책이 시급하다. 하지만 단발 치유법이나 즉흥적 부양책으론 안 된다는 이야기다. 속된 표현으로 언 발에 오줌 누는 식의 부양책으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시골 장의 고객도 농민이요, 상인도 농촌사람이라 한다면 농업 진흥책과 재래시장 개선책은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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