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日작가 ‘미시마’ 민족주의에 심취 할복
‘먹고살기 힘들어’는 옛말… 선진국서 더 많아
한국 年 1만1천명 달해 사회적 예방대책 시급
정치인으로는 2차 세계대전 때 뇌관구실을 했던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는 종전 때 지하벙커(지휘소)에서 비서 겸 애인과 권총자살을 결행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맥아더가 도쿄에 상륙하자 일본 ‘고노에(近衛文磨)’ 전 총리 역시 자살 길을 택했다. 이들 양국 수뇌는 전범으로서 밀어닥칠 굴욕을 예상, 목숨을 끊었다.
이외에도 애국충정을 내세워 자살한 경우는 나라마다 허다했다. 우리의 경우만 봐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분을 참지 못해 자결한 ‘민영환’이 있다. 또, 고종의 밀서를 갖고 헤이그 만국회의에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결한 ‘이준’ 열사가 떠오른다. 어디 그 뿐인가 현대건설의 정모 회장도 그랬고 월남전 때 그곳 승려들은 몸에 기름을 붓고 보란 듯이 분신자살을 자행했다. 이렇듯 자살 동기나 배경 그리고 수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다.
종교계에서도 찬반양론
자살에 대한 평가 역시 일정치 않다. 모두에서 예를 든 ‘민영환(충정공)’이나 ‘이준’ 열사의 자살을 죄악이라 밀어붙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월남전 때 전쟁에 항거, 분신자살을 결행한 승려들에 대해서도 죄악시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자살에 관해서는 종교적으로도 찬반양론이 엇갈려 있는데 그리스도교를 비롯 코란이나 탈무드 입장에선 줄곧 이를 죄악시 해왔다.
하지만 힌두교에선 자살을 죄악시 하는 게 아니라 되레 찬양을 하고 있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해방시키는 행위라 해서 이를 찬미한다는 점은 예사롭지가 않다. 그 사회에선 남편이 죽었을 때 남편 따라 부인이 함께 타죽는 경우가 있는데 그 아내에 대해서는 사회가 크게 칭송을 보낸다는 것이다. 남성본위라고나 할까…. 한국에서도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가 뒤따라 자결한 예는 있어 왔다. 그것을 열녀라 해서 비각이나 정려문 같은 걸 세워 사회교육의 장으로 삼은 일이 있었다.
자살에 대해 학계에선 사회적 여건과 환경적인 요인, 생물학적인 요인, 심리학적인 측면에 연유한다고 정의한다. 좀 더 폭을 넓히면 애타적 자살과 이기적 자살, 그 다음은 아노미적 자살, 그리고 숙명적 자살로 구분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사회구조나 환경적 요인 때문에 자살을 한다지만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으며 젊은 층보다는 고령자가, 기혼자보다는 독신자, 미망인, 이혼경력자, 빈곤층과 실업자가 더 강세를 보였다. 그리고 농촌보다 도시가 훨씬 자살률이 높게 나타나 있다.
생물학적 요인으로는 우선 유전을 생각하기 쉽지만 자살자체가 유전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살을 부추기는 인자는 정신분열증과 이상성격이나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에 많다는 것이다. 다음, 심리학적 측면을 보면 외부의 충격이나 비정상적 환경(생활)을 견디지 못해 저지르는 경우라 했다. ‘참기 힘든 환경으로부터의 도피’가 자살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하지만 생활고로 인해 자살하는 이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못 산다 해서 꼭 자살률이 높은 것은 아니다. 잘사는 EU나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이 못 사는 아프리카나 남방, 사모아족, 인도 오지보다 자살률이 더 높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자살이란 큰 죄인가? 이에 대해선 15세기 무렵 기독교 교회법대전(敎會法大典)이 시퍼렇게 서슬을 세울 때도 자살자와 연루자, 교사(충돌질), 촉탁 살인자를 처벌한 예는 없었다고 한다. 자살을 살인과 동일시하면서도 카톨릭에선 자살자의 재산을 몰수하는 선에서 그쳤다고 했다. 어떻든 자살률에 있어 우리나라가 세계 제일이라 하니 이에 대한 대응책(예방)이 매우 시급한 상황이라 하겠다.
自殺은 죄악인가
2004년도 기준 OECD 국가별 자살률(10만명당 자살자수)을 보면 한국이 최선두를 달리고 있다는데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난 80년대 이후 자살 수치는 큰 폭으로 상승세를 보여 심각성을 더해 준다. 2004년도 통계청이 발표한 자살률을 보면 ① 한국 24.2명 ② 헝가리 22.6(2003년 기준) ③ 일본 18.7명(2002년 기준) ④ 벨기에 18.4명(1997명 기준) ⑤ 핀란드 18.4명(2003년 기준) 순으로 나타나 있다. 또, 2004년도 기준 우리나라 연간 총 자살자수는 1만1523명이고 35만명이 자살을 한 번쯤 생각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같은 수치는 지난 1983년도의 자살자수 3183명에 비해 무려 4배라는데 그 문제성을 드러낸다.
간혹 애국충정이라거나 도의적 측면에서 자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본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다. 명치시대 노기(乃木希典) 대장은 천황의 죽음 앞에 할복자살을 하자 그의 처 ‘시즈코(靜子)’도 뒤따랐다. 일본에선 그를 군신(軍神)이라 떠받드는데 그는 명치천황으로부터 각별한 은총을 받은데 대한 보은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노기에겐 후손이 없다. 일·노 전쟁 때 중국 여순 전투에서 중위(큰아들), 소위(작은아들) 두 아들을 모두 전사시킨 독종이다. 총사령관이 두 아들을 최전방, 탄알받이로 내세워 전사시켰다는 건 눈 여겨 볼 대목이다.
실직, 사업실패, 부정 연루, 가정불화 등으로 자살하는 게 보통인데 잘나갈 때 자살을 자행한 큰별(대가)도 있었다. 세상이 아는 일이지만 내키는 대로 적어 보면 노벨상 수상자 헤밍웨이(노인과 바다)는 엽총자살을 했고 ‘가와바타(川端康成 : 雪國)’는 가스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육체파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죽음 역시 세계적인 사건으로 기억된다. 이밖에도 18세 나이에 비소를 마신 영국시인 ‘채터턴’과 표현주의 선구자라 칭송받던 ‘게오르크 트라클(독일)’이 자살을 했다.
역시 독일인 ‘핑클러’는 밤 산책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자살한 문인은 일본에도 여러 명이 있다. 소설 ‘거미줄’로 유명한 ‘아쿠타가와(芥川龍之助)’를 비롯 ‘인간실격’이라는 소설을 탈고하고 나서 사랑하지도 않는 창녀와 동반자살 한 ‘다사이 오사무(太宰治)’가 그 예에 해당한다.
죽음도 美學인가
대충 떠오르는 대로 대가(大家)와 인기 작가들의 자살사건을 열거해봤다. 상식선에서 말한다면 세인의 칭송을 받고 명작을 남긴 문인들이 왜 자살을 해야 하는가. 노벨상을 받은 작가와 장래가 촉망되는 작가들이 목숨을 끊는데 대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경지에 오르고 보니 더 이상 그 어느 곳에도 ‘레인보’ 따위가 보이질 않다 보니 생을 앞당겼으리라는 예측이 무성할 뿐이다.
정치인이나 유명한 배우의 자살보다 더욱 세계를 놀라게 한 자살사건은 일본의 천재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경우다. 그의 죽음은 가장 일본적이고 가장 ‘미시마적(三島的)’인 자살로 세기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가와바타(川端)’가 노벨상을 받고 ‘미시마’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건넬 정도로 ‘미시마’는 당당한 작가였다. 그는 ‘금각사(金閣寺)’라는 빼어난 소설을 비롯 ‘우국(憂國)’이라는 개성 있는 작품을 남겼다. 전쟁이 그를 낳고 평화가 키워낸 일본 최초의 국제작가인 동시에 동서양의 문화와 생리를 교묘하게 아우른 기막힌 작가라는 평까지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황실중심의 국가로 회귀해야 한다며 일본 보수(극우)층을 충동질해온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국수주의 쪽을 선호했다. 소름끼치는 이야기지만…. 소설 ‘우국’의 주인공 ‘타케다(武田信二)’가 동료 장교의 반란사실을 가슴아파하며 할복자살하자 그의 처 ‘레이코(麗子)’도 남편을 따라 동반자살을 한다. 군대는 천황의 ‘고굉지신’ 임으로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무장된 작중인물…. 그가 바로 ‘미시마’ 자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실록소설(實錄小說)이다. ‘미시마’의 그 엄청난 자살극은 어쩌면 예견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의 저서 ‘행동과 죽음의 美學’을 읽어 보면 ‘행동학 입문’에서부터 ‘결혼의 끝’, ‘유행의 끝’, ‘영웅의 끝’, ‘연극의 끝’ 등 매사에 끝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정신이란 행동의 종속쯤으로 비쳐지는 단면이 적지 않다. 그래서였을까….
자살을 행동으로 옮겼고 또 그것을 장렬(?)하게 미화시키려 했음일까. 그는 전 세계 앞에 깜짝 놀랄만한 자살극을 연출해낸 것이다.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는 ‘다테노카이(楯の會)’ 회원 4명과 함께 육상자위대에 들어가 절규했다. “일본 혼을 지킬 수 있는 건 자위대뿐이다”, “너희들은 사무라이다. 그러니 평화헌법을 뒤엎고 천황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자위대 장병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미시마’는 할복하고 그의 일행이 ‘미시마’의 목을 쳐 둥글리는 유혈극을 벌였다. 사전 협의에 의한 자살로 그는 45세에 이렇듯 세상을 떴다.
‘미시마’의 천왕 옹립론은 당시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얼마 후 일본 극우세력을 일깨우고 재무장과 군사대국부활의 불심지 구실을 한 셈이다. 오늘날 일본은 노골적으로 군사패권주의를 지향,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 주변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일본여당, 특히 극우보수성향이 강한 ‘고이즈미’ 총리의 언행은 바로 36년 전 섬뜩하기 그지없는 천재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과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인생은 ‘은총적인 것’
자살은 죄악이라면서도 그것이 날로 늘어나 한국은 세계 제일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코리아는 자살천국이라는 뜻이다. 자살의 배경이나 유형을 따지려들면 끝이 없지만 먹고 살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사조의 변쇠, 환경의 변화 등 그 충격파가 이를 부채질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는 ‘가난해서, 못살아서’ 라는 말은 정답이 될 수 없다. 경제 탓이라 한다면 국민소득 100~200달러 수준의 후진국에 자살자가 더 많아야 옳지 않겠는가.
우리는 2만 달러 수준에 접근, 턱걸이를 하고 있다. 급변하는 사회적 유전과 ‘풍요속의 빈곤’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고들 한다. ‘메카니즘’에 짓눌려 그 길을 택하는 경우 같은걸 말한다. 어떻든 자살은 옳지 않다.
인생이란 은총적(恩寵的)인 존재인 것이다. 단 하나의 생명 그리고 단 한 번의 인생이다. 긴 듯 하지만 잠깐 살다가는 유한(有限)한 인생살이다. 그러니 땀 흘려 일하고 고난을 초극, 생을 가다듬어 멋지게 장식해야 한다는 게 모두의 바람이다. 또 한 가지, 자살 예방에 대한 사회적 장치가 전무한 상황이고 보면 이에 대한 연구와 개발 또한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자살이란 생의 가불(假拂)이며 은총에 대한 모반이란 걸 알아야 하겠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