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선, 공천… 그리고 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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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 공천… 그리고 사천

  • 승인 2006-04-12 00:00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우리 정자(亭子) 중에서 기둥 한쪽은 땅에, 한쪽은 물에 담그고 있는 것을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대흥사 일지암, 또는 이요당이나 창덕궁 부용정을 봐도 사람이 바지를 훌훌 걷어붙이고 연못에 발을 담근 형상이다. 운 좋게 그 발치에 스멀스멀 몰려오는 안개라도 만나면 마음마저 내주고 싶을 때가 있다. 경선 바람에 모처럼 아주 드라마틱해진 지역 정치공간에서 다시 이 정자를 생각하게 된다.

공천 문제에서 파생된 탈당에 당적 이동, 투서에 삭발에 극단적인 음독 자해 소동으로 분란의 불씨는 숙질 줄 모르지만 시민 반응은 연못에 발을 담근 부용정인 양 잠잠하다. 경황이 아니겠지만 출마 희망자들은 “창랑의 물 맑으니 갓끈을 씻고 물 흐리니 발을 씻는다”는 맹자의 구절을 한번쯤 곱씹으며 유권자들의 냉정한 가슴을 헤아려 볼 일이다.

이번 공천 잡음이 유난히 심한 일차적인 이유는 전략공천이나 교묘한 경선 회피 탓도 있지만 광역의원은 대략 2, 3급, 기초의원은 4, 5급 대우를 받는 것과 같은 ‘선거 고시’ 잇속도 한몫 작용했을 것이다. 또 역설적이게도 중앙집권적인 공천권을 제한적이나마 지방당에 부여한 유례없는 변화에도 기인한다.

역시 지금까지의 상황만 갖고도 차기 지방선거부터는 정당 공천 배제나 자율적인 정당 표방제로 바꿀 근거는 충분하다고 본다. 극히 일부일지라도 공천권으로 자기권(自己圈) 밖 인물의 정치적 진입을 막고 지역주민보다 ‘중앙’에 밉보이지 않아야 공천을 받는 ‘사천(私薦)’ 행위가 횡행하는 한, 지방자치의 현실은 서글프다. 지역주민만 불쌍하다.

그럴수록 우리 앞에는 이른바 ‘좋은 물’로 지방 일꾼들을 가득 채워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놓여 있다. 썩은 물밑에서 오물로 생긴 암모니아를 분해할 여과 박테리아 같은 사람도 물론 필요하겠으나 공천은 단순한 인물 교체 수단만이 아니다. 때에 따라 검증되지 않은 물이 더 더럽고 독성 강한 물로 바뀔 개연성 때문이다.

입만 열면 저마다 지방의 미래를 열겠다는데 실제로 그랬는가. 책임정치 한답시고 동네 일꾼에게 정당 공천장을 줘서 과연 동네 주민에게 이로울 게 뭔가. 줄서기와 충성 경쟁과 가짜 종이당원 양산으로 정치발전에 보탬이 된 적 있는가. 지방 구석구석까지 지배적 정당 구도가 형성되고 지방의 정치사회가 이와 연계된 명망가에 장악된 결과는 어떠한가. 정치권이 미신처럼 신봉하는 공천권 독점이 지방자치의 혈맥을 짓누르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과 비합리적인 요소를 다소라도 덜기 위한 수단이 경선이고, 특히 경선의 신뢰성 확보다. 지방선거가 중앙당의 대리전 내지 대선의 전초전으로 흐를 위험성을 늘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물갈이 운운해서 바꾸면 그만이고 당에 득이 된다 싶으면 전략공천으로 찍어누르는 방식이 경선 불공정성의 빌미가 된다.

이 경우에 혹시 공천은 곧 당선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면 이는 중앙에서 직접 임명장을 주는 결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지방의 주인이 주민이고 정당의 주인이 당원이라 할 때, 모든 지방 권력은 상향식으로 나와야 이치에 맞다. 민주주의가 경쟁을 통한 권력 교체를 의미한다는 헌팅턴의 지적은 지방선거에도 적용된다. 즉, 권력교체에 따르는 어떤 비용도 감수하겠다는 시민적 합의인 것이다. 갓끈을 씻을 물인지 발을 씻을 물인지도 유권자의 판단 영역이다.

끝으로 옛날 정자가 한쪽 발을 물에 담근 이유를 확실히 해둘 차례다. 이것은 주위에 군자와 소인 중 누가 모여드는지 돌아보며 자신을 먼저 닦으라는 암시였다. 성현군자를 가리자는 지방선거가 아니지만 가슴속에 그만한 정자 하나씩 품지 못하겠거든 지금 그만두길 권한다. 정치개혁의 연꽃이 핀 연못에 함부로 발을 담그지 말라. 그 물에 진정 ‘갓끈’을 씻을 수 있어야 지방자치는 허명(虛名)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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