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 연구에 우월주의. 정치논리 배제도 필요
백제역사관 개관 바탕, 신라권 수준으로 개발돼야
은산별신굿 고증. 서동-선화공주 민화수집도 중요
지난
여기서 관계기관, 전문가들의 노고에 치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아쉬움 같은 걸 느끼는 건 무엇 때문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공주, 부여, 익산 등 백제권은 서둘러 신라권(경주)수준으로 개발시켜야 함에도 쇠걸음[牛步]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이를 제대로 발굴, 재현하려면 많은 시간과 투자, 연구, 분석 같은 게 있어야 할 줄로 안다. 백제권 개발을 추진하려면 매장문화재 인양(引揚)이나 옛 도심과 성곽의 보수와 재현 못지않게 시급한 것으로는 역사정리라 할 수 있다.
三國은 모두 문화대국
백제 후예인 우리 모두는 그 터전에서 긍지와 자존(自尊)을 내세우며 살아가면서도 또 다른 측면에선 아픔과 아쉬움 같은 걸 느낀다. 민족사를 정리하려면 보다 과학적으로 연구 분석, 평가돼야 하며 여기에 정치논리나 편견, 유아(唯我)주의 같은 게 작용해선 안 된다. 하지만 지난날엔 유아주의와 편견이 판을 쳐왔다는 걸 부인할 길이 없다. 고구려는 북측(평양)이 ‘단군’과 ‘기자조선’을 내세워 세계의 중심이라는 식으로 ‘주체사상’과 연결시켜왔다. ‘단군’, ‘기자릉’을 단장, 고분벽화를 자랑해 온 북측이 크나큰 오류를 범해왔다는 점 외면할 길이 없다. 백제와 신라에 대해 올바른 평가는 접어두고 오로지 ‘고구려’의 우월성만을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북측은 옛 고구려 수도였던 집안(輯安)의 유물과 ‘광개토대왕비’ 같은 걸 잘 수호했어야 옳지 않았느냐는 반문을 피할 길이 없다. 중국에선 ‘동북공정’ 운운하며 그 일대를 개보수해 놓고 조선족은 접근조차 못하게 담장을 쳐놓고 있다. 그것을 계룡장학회가 복제를 해다가 독립기념관에 세워 놓았다. 북한은 고구려 지상(至上)을 외쳐 왔지만 혈맹인 중국에 대해 시원스레 소리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이점을 우리는 늘 아픔으로 느껴왔다.
그러면 신라 후예들은 어떠했는가? ‘통일신라’를 내세우며 한반도역사(삼국)는 신라가 대표성을 지녔다는 식으로 유아주의에 빠져 있었다. 백제는 멸망국이고 고구려 또한 그 범주에서 못 벗어난다는 식의 논리로 일관해왔다. 외세(外勢)를 업고 동족을 멸망시키고도 이렇다 할 반성이나 해명 없이 늘 ‘승자논리’에 도취해 있었다. 그 시대 삼국이 피 흘리며 싸운 것은 민족의식보다 부족개념이 우선한데 연유한다. 앞으로 역사정리를 하려면 편견이나 우월주의를 접고 균형 있는 시각에서 다뤄져야 하며 매판사관과 굴절된 단면 같은 건 서둘러 바로 잡아야 한다.
百濟의 始祖는 누구인가?
역사정리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 아마추어 측에서 할 말은 있다. 우선 백제시조가 누구냐고 물어 온다면 즉답에 자신이 없다. 혹자는 ‘비류(沸流)’를 지목하고 다른 쪽에선 ‘온조(溫祚)’를 내세우는 걸 엿볼 수 있다. ‘비류’와 ‘온조’는 원래 친형제다. 일각에선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아들로 착각하는 이가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들 형제의 친부는 ‘우태(優台)’라는 사람으로 북부여왕 ‘해부르’의 서손(庶孫)이고 생모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부여 ‘연타발’의 딸이었다. 그러나 ‘우태’가 사망하자 ‘소서노’는 졸본 부여에서 홀로 살아가는데 ‘주몽’이 부여에서 쫓겨나 졸본에 도읍을 정하며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 이때 ‘소서노’를 왕비로 삼으며 ‘비류’, ‘온조’를 친자식처럼 대했다.
나라를 세우는데 ‘소서노’와 ‘비류’ 등의 공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몽’이 후계를 ‘비류’에게 넘기질 않고 본처 출생 유류(孺留)로 삼자 이에 불만을 품고 세 모자가 남하, 고구려에서 분리, 백제국 창건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비류’, ‘온조’ 두 형제 중 누가 시조인지 보통식자는 분간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첫 도읍지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양론으로 갈린다. ‘온조’의 한강이북 위례성(황해도 재령) 정도(定都)설과 ‘비류’는 인주(仁州)에 도읍을 정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온조’는 그 후 고구려와 신라 등과의 전쟁에서 밀려 한강이남 하남시 춘궁리 방면이거나 풍남토성, 또는 몽촌토성에 있다가 천안 직산(위례성)을 거쳐 웅진(공주)으로 남하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비류’가 백제의 시조로 되어 있다지만 어느 기록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침에 ‘비류’는 망하고 측근들은 일본열도로 도망갔다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그 후 일담이 궁금해진다. 그들 도래인이 일본건국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만은 일인들도 시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 전국(戰國)시대 ‘겐지(源氏)’와 ‘헤이케(平家)’는 어느 쪽이 신라계이고 또 백제계인지 이 역시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백제사 정리 시급하다
백제와 신라, 고구려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는 일본(倭)과 중국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우리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 울분을 금치 못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려 한다. 일본은 줄곧 그들의 2600년사 속에 한민족 반만년사를 축소, 접목시켜 놓고 우월감(?)을 내세워 왔다. 아직도 ‘징구고고(神功皇后)’의 신라정벌과 ‘미마나(任那日本府)설’을 집요하게 합리화시키려 광분해온 그들이다.
하지만 그 여인은 무녀(巫女)로 신라 땅 영일만에 살다가 불미스런 일을 저지르고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이야기다. 그 후 섬나라 원주민과 세를 규합, 신라를 치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주술(呪術)로 “배를 띄워라!”, “바람아 멈춰라!”라고 호령하며 출병, 신라를 쳤다고 하지만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조작설이다. ‘미마나일본부’설 역시 조작에 지나지 않으며 삼국시대 해적(왜)들이 일부 우리의 영·호남 해안에 출몰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학자 중에는 요즘 우리의 ‘가야문화’를 연구하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 70년대 필자는 어느 학자에게 진반농반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는 그 시절 가야문화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때였다.
“가야문화에 관심을 갖는 걸 보니 미마나(任那日本府 )를 합리화시키려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하자 “화두(話頭)가 매끄럽지 않으십니다”라며 정색을 했다. “내가 에도코(江戶子)는 아니지만 이레 뵈도 옛 서울 교토(京都) 태생이거든요.” 양심세력의 한 사람이라는 말로 들렸다. 하지만 그들은 일찍이 광개토대왕 비문의 변조, 역사왜곡은 물론 백제, 신라, 고구려 모두를 폄하하며 한 세기를 호령(?)해왔다. 심지어 신라건국의 ‘석탈해’와 ‘박혁거세’까지도 설화속의 인물이라 따돌리며 백제에 대해서도 사마왕(近肖古, 武寧王)시대에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었다.
무령왕릉 출토품이 규슈(九州), 후나야마(船山)고분의 그것과 너무도 유사하다는 데 공주와 ‘기쿠스이’는 자매를 맺은 지 27주년을 맞는다. 그러나 무령왕이 ‘비류’, ‘온조’, 구태(仇台) 그 어느 왕 혈통인지, 아는 이가 많지 않을 뿐더러 출생지가 현해탄 바다 위, 작은 섬 ‘가가라시마’라면 그 배경도 분명히 챙겨야 한다. 또 무령왕의 관이 일본 큐슈지방에서만 생성하는 삼(杉)나무라면 그간 알려진 내용보다 더 왕성한 교류가 있었다는 뜻이다.
‘羅濟通門’ 야화라도…
우리는 걸핏하면 백제가 해양(海洋)대국이며 동북아의 맹주로 고대일본왕실의 섭정은 물론 뛰어난 문물을 창출한 나라였다고 자랑해왔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백제가 해양대국이었다면 ‘비류’와 ‘온조’, ‘구태’ 등 어느 시대인가를 가려내야 한다. 일설에는 ‘비류’가 북쪽은 고구려, 남에는 신라, 한강 이남에는 ‘온조’가 자리 잡아 발붙일 곳이 없어 한반도 서해안과 중국 동해안을 장악했다는 설이 있다. 중국사서(史書)에도 백제이야기가 나오지만 ‘비류왕’의 해양진출을 다룬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백제의 전성기라면 ‘사마(斯麻)왕’ 즉 ‘무령왕’시대라 할 수 있는데 ‘비류’는 ‘온조’왕 시대에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다음 ‘의자왕’에 대한 역사정리도 보다 성실하게 해두는 게 옳다는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의자왕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 나당연합군에 패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보다 깊은 연구와 분석을 거쳐 가감 없이 정리해지길 바란다. 의자왕은 당나라 낙양(洛陽)으로 끌려가 억눌려 살다가 세상을 떴다. 그곳에 묘비가 있다 해서 계룡장학회(이사장 이인구)에서 조사를 한 바, 주민들도 이를 증언해 주었다. 이에 그곳 지방정부와 박물관을 방문, 추모비 건립을 협의해왔다. 또 현지에서 한·중 학술세미나 개최와 화가들의 교류를 추진해오다 중국 측의 ‘동북공정’ 앞에 주춤해 있는 상황이다.
백제문화를 논하다 보면 제례(잔치) 이야기 또한 비켜갈 수가 없다. 백제문화제와 ‘은산별신굿’에 대해, 하고 싶은 말 역시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백제제’는 부여, 공주가 격년제로 거행해왔는데 이젠 교통망도 잘 갖춘 상황이니 공주, 부여가 합동으로 시행하면 어떨까 한다. 공주는 백제 융성기의 문화이고 부여는 멸망국의 한을 품은 곳이 되어 축제내용(프로)에서 다를 수 있다. 또 행사를 종합하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날로 축제내용이 승화되어가고 있다지만 더욱 고증에 힘써야 한다는 생각이다.
70년대일이다. 백제왕실 복식을 제대로 파악하질 못한 탓에 실수를 저지른 기억이 떠오른다. 대전에서 전국체전(갑년)이 열려 전야제행사를 필자가 맡았을 때 이야기다. 그러니까 ‘예총’ 충남지회장 시절, 전야제에 백제왕실과 문무백관, 백제군사 700명이 거리행진을 하는 큰 잔치였다. 그 시절 왕실의 복식연구가 부실한 때라 섶과 고름에 은박으로 수(壽)와 복(福)자가 찍힌 걸 입혔다가 뼈아픈 지적을 받은 일이 있다.
그 다음, 부여 ‘은산’에서 열리는 ‘별신굿’은 단순한 무속잔치가 아니라 ‘백제광복’을 꾀하다 산화한 복신(福信)장군과 ‘흑치상지’ 등 군사의 위령행사이기도 한 것이다. 이 제례는 장장 14일간에 걸쳐 거행되는 일대 드라마다. 어느 지방에서도 보름 동안 온 마을이 동원되어 목욕재계, 정성을 드리는 잔치는 없을 것이다. 더욱 가다듬어 발전시켜야 한다. 할 일은 또 있다. 역사정리에 있어 전투기록과 갈등장면만을 강조할 게 아니라 민화(民話)와 야사 같은 걸 수집, 발굴할 때라 생각한다. 피 흘린 기록은 이쯤 해두고 평화시의 민간교류와 삼국의 동질성같은 것을 발굴해야 할 때다.
백제와 신라남녀가 탑돌이를 했다거나 좀 더 구체적인 것으로는 백제의 ‘서동’이 서라벌의 ‘선화공주’와 밀회를 한 내용 같은 걸 좀 더 확대, ‘가극’이나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한다. 이제는 누가 ‘픽션’을 쓴다해도 나무랄게 없다. 한 예로 무주에 있는 ‘라제통문’을 소재로 소설을 써도 좋다. 백제, 신라 민초들이 서로 내왕했던 조그마한 ‘터널’ 그것을 테마로 야화(夜話) 같은 걸 써내면 어떨까. 이젠 전쟁이야기가 아닌 민초 이야기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