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주는 이 경건한 정신(natural piety)의 극치와 감동을 그는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절창했다. 어린이는 이 땅에서 자연이 가져다 준 가장 거룩하고 영원하며 절대적인 존재임을 선언한 것이다. 하늘에는 무지개가 있고 땅에는 우리들의 꿈이요, 영원한 미래인 어린이가 있다는 것을 찬탄했다.
어린이는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한 감동일 뿐이다. 더 이상 다른 말은 필요 없다. 곧 어린이는 인류 행복의 상징이요, 실제다. 워즈워드는 이 비밀을 우리에게 통고한 최초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삶의 목적은 행복에 있다. 20세기 석학 B.러셀이 한 말이다. 먹고 마시고 향락하고 본능을 만족시킨 것으로 행복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불행한 사람들도 본능에 대한 욕구는 강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능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불행해진 것이다.
행복은 창조의 정신의 산물이다. 우리가 자유를 갈구하는 것도, 평화를 염원하는 것도, 그리고 이성에 의한 질서를 요구하는 것도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없다. 창조의 정신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창조의 정신이 결여된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창조적인 노력만이 감동과 보람을 낳기 때문이다. 행복은 감동이요, 보람일 뿐이다. 물질마저도 창조적인 노력의 산물이 아니면, 불행의 화근이 될 뿐이다. 작은 물질일 지라도 창조적 노력에 의한 소득일 때 감동과 보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에 바이블에서 행복은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이를 자가 없다’고 한 말과 같은 것이다. 순수한 양심을 간직하고 있을 때만 감동과 보람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양심이란 자연이 가져다 준 경건한 정신, 그 자체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인 소치라 할 것이다.
상(傷)한 마음으로 행복을 볼 수 없다. 창조의 정신을 일궈낼 수 없으며 감동과 보람으로 거둬 드릴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행위는 자기 자신의 양심의 법정을 가혹하게 파괴시킨 그 책임을 사회공동체는 물어야 할 책무가 있다.
철학자 칸트는 사람을 본능적 인간, 이성적 인간, 인격적인 인간상으로 구분했다. 궁극적으로 행복은 인격창조의 결실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자유의지에 의한 자율적인 자기 통어능력을 포기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라고 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살아왔다. 세계가 한국을 기적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들의 꿈이요, 영원한 미래이며 행복의 표상인 어린이들의 건실한 인격적 삶을 위해서 힘써 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런 초심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위기감 속에서 한국의 미래를 걱정해본다.
더구나 지식기반 사회는 전문적 지식이 강조되면서 인격 창조를 위한 교양적 지식을 멀리하고 있는 듯 하지만 행복의 지수를 미래 한국의 척도로 삼고 있는 한, 각 개인의 행복을 위한 창조의 정신의 발현과 그 결실로서 감동과 보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품격을 높이기 위한 전반적인 사회문화적 노력 없이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자연을 보전하고 기술이 있으면서 인격과 창조의 정신이 융합돼 감동과 보람을 공유하는 사회, 그 곳에 행복이 있고 그 정점에 어린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가슴 깊이 새기면서 정부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행동할 때임을 자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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