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 중핵도시·동북아 거점도시로 ‘승승장구’
행정도시?도??이전지 인구 70만명 수용 추진
기능과 조형미 어우러진 신도시로 건설해야
머지않아 충남권엔 ‘행정도시’와 충남도청이 들어설 두개의 신도시를 건설한다
그 곳엔 해발 260m의 정월산, 엇비슷한 크기의 용봉산이 우뚝 서 있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지리상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요지라는 평을 받는다. 또, 도시구성의 절대요건인 수리시설만해도 동북쪽 18km 지점에 대청호, 지호지간에는 금강이 유유히 흐른다. 서울까지는 120km 거리, 인근에 고속철, 고속도로, 공항 등을 두루 갖춘 요충지다. 이 도시의 기본설계는 ‘국제현상공모’ 형식을 빌려, 2007년부터 부지조성, 2012년에 가서는 중앙의 행정기관이 줄을 이어 들어설 것이다. 그렇게 해서 2030년에 가선 인구 50만을 수용하는 도시를 건설할 계획으로 있다.
또 한 가지, 거의 같은 시기에 충남도청을 이전한다. 확정된 지역으론 홍성군 홍북면과 예산군 삽교읍 일원 2300만평에 신도시가 들어설 것이다. 이 지역 또한 천혜의 요충으로 가야산과 용봉산에 둘러싸인 데다 삽교천과 금마천, 예당저수지가 있어 수자원에 부족함이 없다. 거기에 장항선 철도까지 끼고 있다. 2010년 공사에 착수, 2013년에 입주, 인구 20만의 신도시를 건설할 수 있으며 예산은 2조3000억을 잡고 있다. 이에 대비, 정부 각 부처와 협의중이며 이는 국가적인 경사일 뿐 아니라 충청인의 복음이므로 차질 없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新都市에 거는 기대
우리는 행정도시와 도청이 들어설 두 도시에 대해 많은 것을 염원하며 또, 갖가지 생각을 해본다. 영원히 쇠하지 않고 번영할 그런 행복한 도시를 건설해야 한다는 데서 그러하다. 역사적으로 한 시대 빛을 발했다가 망해버린 도시는 얼마든지 있어 왔다. 옛날 중남미에서 ‘잉카’문명을 꽃피웠던 도시들이 그러했고 ‘소돔’과 ‘고모라’도 이젠 전설 속에서 부침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천년의 역사를 지닌 ‘로마’와 ‘베이징(北京)’ 같은 늙은 도시가 노익장을 과시하는 이유를 우리는 알만하다.
옛날 개념으론 인구의 밀집, 검은 연기의 공단, 도시의 대형화 같은 걸 미덕으로 삼아온 시대가 있었다. 요즘 뉴욕의 1000만, 도쿄의 1200만 상해(중국)의 1400만을 놓고 단순 비교하는 경우가 있지만 도시의 비만(肥滿)은 기능마비의 적신호라 해서 ‘필사탈출’을 모색하는 경향이 있다. 도시건설에선 도로망, 상하수도, 전기, 쓰레기 문제 따위는 기본이고 ‘스카이라인’ 건축형태의 다양화와 소음, 낙진, 일조권 등을 따지는 세상이다.
우리에게도 ‘서울은 만원이다’는 소리가 60년대부터 있어왔다. 쾌적한 생활권 ‘행복한 도시’를 희망하는 건 현대인의 권리라 할 수 있다. 작금의 도시는 어떠한가? 지구의 온난화, 대기오염, 인구의 밀집 등으로 도시에 살기가 힘들다는 푸념이 무성하다. 자원의 고갈, 생태계의 변화로 선진국들은 바다와 외계(外界) 쪽으로 눈을 돌려왔다. 그래서 선진국들은 ‘수중도시’ 건설, 달나라, 별나라 개발을 서두른지 오래다. 혹자는 지구환경과 도시의 비만, 인본(人本)이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아 구제불능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탄한다.
우리는 ‘카뮈’에게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존주의 기수요, 노벨상 수상자인 그는 ‘이방인’, ‘시지프의 신화’ 등 걸작을 내놓은 프랑스 작가다. 그는 타가자[岩鹽都市]를 설정, 그곳의 환경과 인간관계를 그리고 있다. 우리에겐 황혼(黃昏)이라는 표제로 소개된 작품이다.
- 타가자 이야기는 물론 픽션이다. ― 직사광선이 소금바위를 사정없이 내리 쬐어 눈을 뜰 수가 없다. 그 소금바위 틈에 한 선교사가 총대를 내놓고 후임선교사가 들어오길 기다린다. 저격을 위해서다. 그는 “얼러리!” 소리를 연발한다. “어처구니없구나!” 소리가 그렇게 튀어나온다. 이 선교사는 토착민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고 혀[舌]까지 잘려 제대로 말을 못한다. 그는 후임선교사를 저격하라는 지령에 따라 총대를 겨누고 있다. “얼럴러!”를 연발하며
- 황당한 내용이지만 ‘메커니즘(mechanism)’의 횡포와 인본(人本) 그리고 지구환경의 변이(變異)를 걱정한 나머지 이런 작품을 썼는지도 모른다. 소금바위 만해도 그렇다. 향후 우주에 큰 변이가 올 경우 암염도시가 생길 수 있다는 예언이 아닐는지….
어떻든 인류는 단 하나뿐인 지구의 수호와 살기 좋은 행복한 도시를 건설해야 한다는 소명을 안고 있다. 때문에 행정수도, 충남도청 소재지는 기능적이며 아름답고 살기 좋은 그런 도시이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시민들도 나름대로 신도시에 대한 꿈을 갖고 있을 것이다. 상징적인 축조물은 무엇이며 직선과 곡선, 그리고 획일 아닌 다양성, 탈회색(脫灰色) 건축물, 색감과 대칭, 개성 있는 그런 도시이길 바란다.
상징적인 건물로는 뉴욕의 ‘마천루’와 ‘자유의 여신상’ 도쿄는 ‘도쿄타워’와 ‘미츠이(三井)빌딩’ 북경하면 ‘자금성’ 인도는 ‘타지마할’, 파리는 ‘개선문’과 ‘루브르 박물관’, 로마의 ‘바티칸시티’ 싱가포르
충남도청의 ‘大田시대’
충남도청은 일제가 쳐들어오면서 공주로 정했다가 1932년 대전으로 옮겼다. 공주는 비좁고 오지라 해서 경부선과 호남선(철도) 분기점인 대전으로 이전한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허허벌판이던 대전은 급성장 오늘에 와선 서울, 부산, 대구, 인천과 함께 보란 듯이 5대도시 반열에 올라 있다. 항간에선 도청 대전유치가 토호 김갑순의 활약에 의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재리(투기)에 밝은 김갑순이 경부선과 호남선이 깔릴 것을 예견, 땅 투기를 한 것뿐이다. 도청을 옮길 즈음 대전은 일개 읍(邑)으로 인구 1만도 안되는 소도읍이었다. 그러니까 도청이 들어서면서 급부상, 해방직전에는 인구 5만의 시[府]로 승격을 했다.
오늘날 대전에 일제시대 세워진 건물로는 도청을 꼽을 수 있다. 당시는 2층 건물이었던 것을 해방 후 1층을 더 올려 오늘날 3층으로 그 위용(?)을 자랑한다. 대전시청은 전상공회의소 건물에 있었다. 대전여중은 체육관 붉은 벽만이 남아 있고 목동 대전형무소는 망루(望樓)만 남아 있어 옛날의 아픈 흔적을 말해준다. 이 밖에 삼성초등학교 건물과 인동의 전신전화건설국(당시 우체국) 그리고 용두동 날맹이 ‘충혼탑’이 있다. 대전방송국은 대흥동에 신문사(中鮮日報)는 삼성동에 있었고 역전의 중앙극장과 대전유원지(상수원)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당시의 관청, 산업체 등은 6·25 때 폭격을 맞아 불타버린 데다 해방 후 대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취를 감췄다. 요즘 70~80대 고령층 인사들은 가끔 옛날 대전 이야기를 떠올린다. 인력거를 타고 출퇴근하던 도장관(지사)의 모습, 게다(下馱)를 딸각거리며 거리를 누비던 일본인들, 경심관(京心館)에선 ‘외팔과 외눈박이’, ‘당게사젱’의 칼솜씨, 미야모토(宮本武藏)의 쌍칼잡이 영화를 상영했다.
거기에 백마를 탄 일본천황의 관병식 장면, 전시 일본군의 전쟁실황 등을 선전했다. 더러는 ‘일본유곽’의 질퍽거리는 야한 풍속과 술집에서 새어나오는 사미센(三味線)가락 등을 회상하는 이도 있다. 징병, 징용으로 끌려갔던 이야기하며 눈에 핏발이 선 헌병들의 행패 등 아픈 기억을 떠올리리는 노장들….
일제시대의 大田거리
머지않아 충남도청은 홍성과 예산사이 용봉산, 가야산자락 그곳으로 옮긴다. 그러니 노장 측에선 옛날 대전도청 시대에 대한 아픔과 함께 한 가닥 향수(鄕愁)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 시대 대전거리를 되짚어보자.
▲ 목척교(木尺橋) = 당시 도청과 대전역은 마주 바라보는 거리지만 중간에 대전천이 흐르고 그 위로 2차 선 폭의 나무다리가 놓여 왕래했는데 그것이 목척교다. 그 천변엔 철따라 서커스공연과 씨름판이 열렸다. 여름철엔 멱도 감고 천렵도 했다. 또, 하천에선 개구리가 울어대고 반딧불이도 날아다녔다. ▲ 대전신사(神社) = 지금의 성모병원자리. 학생들과 시민들이 강제참배를 강요당했던 곳이다.
▲ 학교 = 교육기관은 대전 중학교를 비롯 대동여고(대전여고 전신) 그리고 대전직업학교(대전공업학교의 전신), 대전여중과 대전공과학원, 초등학교로는 사카에국교(榮町, 삼성), 아사히국교(旭町, 인동) 등이 있었다. ▲ 경찰서 = 현재의 중부서 자리. 절그럭거리며 긴 칼을 찬 순사들의 본거. ▲ 형무소 = 전 반공연맹자리로 오늘에 와선 아파트 숲 사이로 망루만 우뚝 서 있다. ▲ 대전비행장 = 지금의 신시가지 둔산 일대가 비행장이었는데 주로 연습기가 이착륙했다.
▲ 헌병대 = 중구청 별관자리, 옛 보안대자리였다 ▲ 군수창고 = 문화동의 군피복창 자리, ▲ 제사공장 = 천동에 그 공장 흔적이 남아 있다. ▲ 극장 = ‘경심관’(대전극장)과 부민관(중앙극장) 두 곳이 있었는데 가끔 일인 지사부부도 관람을 했다. 그때는 극장 측에서 미리 특석을 배정, 앞뒤 둘레에 한 두석을 비워놓고 예우를 했다. ▲ 철도관사 = 철도공무원을 위한 관사가 소제동에 있었다. ▲ 전기회사[鮮電] = 신흥동에 있는 현재 변전소자리다. ▲ 공동묘지 = 오늘의 용전동일대로 현재는 아파트단지.
▲ 미나카이(三中井) = 역전에 있던 백화점으로 주로 일제상품을 내놓았다. 그때도 시세이도(慈生 堂)에서 나온 루즈, 콤팩트, 크림 같은 걸 팔았다. ▲ 목욕탕(風呂 - 후로) = 일인이 경영하던 목욕탕, 지금의 중앙시장 안에 있었는데 조선인을 받지 않았다. 미국에서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듯 일인들도 그러했다. 조선인 지사 ‘이범익’이 한복차림으로 그 목욕탕엘 찾아갔다가 역시 거절당했다.
이에 노한 이지사 “내선일체를 외치는 마당에 이럴 수 있느냐?”며 10일간 영업정지를 먹여 버릇을 고쳤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 사카에마치(榮町 ) = 오늘의 삼성동 일대, ▲ 혼마치(本町, 대전역 앞) 일대. ▲ 아사히마치(旭町, 신흥동) 등 세구역이 대전의 중심이었다. 여기에는 일인들의 점포도 뒤섞여 가네코야(金子屋)라는 시계점, 무슨양행(洋行), 화식집(串味, 회집) 미소(된장, 간장) 가계도 있었다.
이것이 해방 전 대전시의 풍속도이며 시세(市勢)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아 일인들은 남부여대 저의 나라로 쫓겨 갔다. 그 때 일인들 인사는 ‘사요나라’가 아니라 “또 만납시다”, “또 온다”였다. 이후 대전은 승승장구 교통의 요지로 국토의 ‘중핵도시’, 과학의 메카로 탈바꿈, 오늘날 세계 앞에 날개짓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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