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진의 충청비사]46. 도쿄 한복판에 김옥균 가묘

[안영진의 충청비사]46. 도쿄 한복판에 김옥균 가묘

타국 방치 100년 김옥균 가묘 공주기념관 등 위상제고 시급

  • 승인 2006-03-09 00:00
  • 前 중도일보 주필前 중도일보 주필
강제철거 위기 대사관 관리비 대납으로 모면
道 공주시 고향 정안면에 기념관 건립 박차

계룡장학회, 구마모토현 명승 여대남 묘 확인
문화유적 탐구.백제 연구.추모제 등 추진

오사카 위치 임진란 희생자 귀.코무덤 등
‘죽어서도 타국살이’ 아픈상처 치유 과제로





구한말 ‘개화’의 선구 김옥균 묘가 도쿄 한복판에 있다는 건 가히 충격적인 뉴스다. YTN이 엊그제 그렇게 전해왔다. 갑신(甲申)정변의 주역,
삼일천하(三日天下)의 중심에 우뚝 섰다가 청나라와 일본, 수구파(守舊派)에 의해 좌초됐던 풍운아 김옥균…. 고향에도 없는 그의 묘가 도쿄 어느 공원에 있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공주출신인 그는 개화기 때 러·중·일 각축의 와중에서 개항(開港)만이 살길이라 혁명을 주도했던 인물로 ‘대원군’과 ‘명성황후’ 등 보수파에 의해 청나라 상해(上海)에서 암살 당했다.

성장과정을 보면 7세 때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가 양부가 강릉부사로 부임하자 그를 따라 현지에서 율곡(栗谷)학풍을 익힌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해 ‘홍문관 교리’에 오를 정도로 전도가 양양한 것처럼 보였다. 이후 그는 이동인, 박금수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을 전수받아 ‘개화당’의 지도자로 부상, 외무아문(外務衙門), 참의 등 요직을 거치면서 개항(開港)을 외쳤다. 이를 위해 재정이 필요함을 절감, ‘차관’을 얻으러 일본에 건너갔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수구파와 ‘뮐렌도르프’ 러시아 공사의 사주에 휘말린 일본공사 ‘다케조에 (竹添進一郞)가 김옥균이 휴대한 고종황제 국채위임장이 위조문서라고 본국에 허위보고하는 바람에 그 꿈은 무너졌다. 이에 김옥균은 절치부심, 청나라와 수구파를 견제하며 ‘우정국’ 낙성식 날 한규직 등 수구파를 제거,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개화파가 깃발을 올린 것이다. 여기서 그는 ① 문벌폐지 ② 양반신분제도 폐지 ③ 인재(서민)의 등용 ④ 국가재정의 투명한 집행 ⑤ 근대공업의 건설 ⑥ 광업개발 ⑦상공진흥과 회사제도의 장려 ⑧ 어업, 목축, 임업의 개발 ⑨ 화폐개혁 ⑩ 전신(통신) 발전 ⑪ 철도, 해운의 도입 ⑫ 인구조사실시 등을 내세웠다. 이 밖에도 자주국방(군 근대화), 신앙의 자유, 신교육 실시, 종교의 자유 등을 주장한다.

그가 내세운 개혁은 당시로선 경지동천(驚地動天)할 내용들이었다. 그러니 ‘쇄국정치’로 일관해온 옹고집 ‘대원군’과 보수층(사대부, 유림)의 반발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이었다. 그러니 속방화(屬邦化)를 노리는 청나라와 대륙침공을 꿈꾸는 일본이 개화(자립자강)당을 곱게 봐 넘길 리 없었다. 소수정예의 혁명은 그래서 ‘3일천하’로 끝났다. 여기서 김옥균은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 동지 9명과 함께 후일을 기약하며 일본으로 망명을 한다.


‘삼일천하’의 풍운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그곳에서도 홀대받는 신세가 돼버렸다. 일본입장에서도 명성황후와 대원군, 그리고 청국과 러시아와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일개 망명객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발붙일 터전을 잃고 부평초처럼 물위에
둥둥 떠다니는 신세가 돼버렸다. 전에 친분을 맺었던 일인들 역시 만나길 꺼려, 끝내는 유배까지 감수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첫 유배지는 도쿄 앞바다, 태평양 상에 위치한 오가사와라(小笠原) 섬이었고 두 번째 귀향살이는 북해도(北海道)였다. 이렇게 10년 세월을 보낸 망명객 김옥균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후 도쿄에 돌아온 그는 1894년 3월 청나라 상해(上海)로 망명을 했으나 명성황후(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시해(암살)를 당한다. 이때 청나라는 수구파의 요청에 따라 김옥균의 시체를 넘겨주는 바람에 ‘무언의 환국’을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한양(양화진)에선 그의 시체를 내놓고 능지처참한 것이다. 이렇듯 개화당의 선구(先驅) 김옥균은 두 번 죽임을 당하는 꼴이 되었다. ‘해양세’와 ‘대륙세’ 그리고 수구(守舊)와의 갈등, 그 틈 사이에서 개항을 염원하던 ‘혁명아’는 그렇게 쓰러졌다. ‘풍운아’의 생애는 그토록 불운했으나 세상은 또 한 번 바뀌었다. 4개월 후 일어난 ‘갑오경장’으로 개화파가 다시 정권을 잡자 ‘김홍집(총리대신)’과 ‘서광범(법무대신)’의 상소로 김옥균은 복권(추서), 규장각 대제학이 된다. 1910년의 일이다.

이는 아득한 옛날 사건이 아니라 불과 96년 전 일이다. 그는 ‘갑신일록’, ‘치도약론’, ‘기하근사’ 등의 저서를 남길 정도로 박식한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고향 ‘공주’에도 없는 묘가 도쿄에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일본의 옛 지인들이 그의 모발 일부를 가져다 가묘를 썼다고 한다. 오늘날 이 가묘를 찾는 이는 없을 뿐 아니라 되레 가묘가 철거될 운명에 놓인 것을 우리 대사관이 관리비를 대납, 겨우 모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김옥균 가묘 옆엔 한국인 첫 일본육사출신 박유굉의 묘가 있으나 사정은 같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한다. ‘자주, 자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개화기, 우리가 처했던 그 정황이 어쩌면 오늘과 흡사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대륙세’와 ‘해양세’가 맞부딪치는 지정학적(地政學的) 고민이란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우리의 경제력이 세계 10위권에 근접해 있다고는 하나 역학구도를 보면 그 시대와 별로 다를 바 없다는 논리다.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 등을 지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옥균에 대한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을 우리는 전해 들었다. 그의 고향 공주시 정안(正安)면에 기념관 건립 움직임이 구체화돼 간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민속학자요, 문화재 전문위원인 심우성씨가 일본을 오가며 갖가지 자료를 수집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기념관 건립을 위해 공주시청과 충남도와 협의를 거쳐 곧 그 청사진이 드러날 것이라는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왕인묘와 ‘귀무덤’, ‘코무덤’



오사카(大阪) 근교엔 왕인(王仁)박사 묘가 있다. 필자는 여러 차례 그곳을 찾아 술 한 잔을 봉분에 붓기도 했다. 요즘은 묘의 관리가 부실해서 주변청소는 고사하고 주민들이 쓰레기를 내다 버려 파리가 ‘윙윙’대는 그런 실정이다. 왕인은 백제인으로 일찍이 섬나라 왜인들에게 ‘천자문’, ‘논어’, ‘맹자’를 가르친 큰 스승이었다. 그 스승의 묘가 요즘 홀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공주(公州)시와 기쿠스이(菊水町)간의 자매결연 장에서 우리 측이 거세게 항의해 언짢은 일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은인에 대한 예우가 고작 이것인가?’ 그럴 양이면 왕인 묘를 파가겠다고 몰아붙인 것이 친선(자매)과 외교 수사(修辭)로선 지나치다 해서 일본 측이 발끈했던 사건이다. 자매결연의 교량역(橋梁役)을 해온 필자로서도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2005년 7월 21일자 본란 참조).

이밖에도 더욱 가슴 아픈 묘 이야기가 있다. ‘오사카’, ‘교토’ 근교의 ‘코무덤(鼻塚)’과 ‘귀무덤(耳塚)’의 경우가 그것이다. 임진왜란 때 침략군(왜)은 조선군대와 의병, 양민(학살) 희생자들의 코와 귀를 닥치는 대로 베어 갔다. 잔악한 도요토미(豊臣秀吉)의 명에 따라 전과(戰果) 확인을 위한 만행이었다. 손발을 자르든가 눈알을 빼 오는 게 어떠냐고 논의하다 그것은 짐이 되니 코와 귀를 자르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혀를 잘라 오면 개(犬)의 그것과 분별하기 어렵다해서 귀와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가져간 것이다.

기막힌 사연이며 잔혹한 전쟁행위였다. 임진왜란을 맞기 전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내왕했지만 그 보고내용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야사(野史)를 듣다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보고와 함께 개중에는 ‘풍신수길’의 관상을 놓고 전쟁은 없다고 말한 이가 있었다는 설이다. 그의 골상이 원숭이 같기도 하고 옆모습은 독사(뱀)를 닮았으니 원숭이는 물론 뱀 역시 바닷물을 싫어하기 때문에 침략은 없을 것이라 했다는 게 아닌가. 우스개 이야기로 우리는 치부하지만…. 그 무렵 조정은 ‘노론’, ‘소론’으로 갈라져 당파싸움을 일삼다 화를 당한 셈이었다. ‘귀무덤’과 ‘코무덤’의 주인공들은 안타깝게도 그 희생자들이었다.


‘계룡장학회’와 여대남



일본 구마모토(熊本)에는 임진왜란 때 소년의 몸으로 끌려가 불가에 귀의(歸依), 명승으로 살다가 간 ‘여대남’의 묘가 있다. 이를 확인한 것은 1980년대 일로 충남도와 구마모토 현이 자매를 맺은 직후였다. ‘계룡장학회(이사장, 李麟求)’에서는 현지답사와 역사 탐구를 거쳐 400년간 단절되었던 그 연고를 찾아냈다. 그 바람에 경남의 여씨(余氏) 문중과도 연결, 지난 2000년 현지에서 추모제를 올린 바 있다.

그럼 여대남은 누구이며 어린 소년이 어떻게 볼모로 잡혀 갔는가? 임란 때 악독한 가토(加藤淸正)에게 잡혔는데 13세의 여대남이 나이답지 않게 당당하고 영특한데 감동, 그를 데려다 옆에 두고 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 ‘가토’의 명에 따라 불교에 입문, 일요(日遙) 스님이라는 법명으로 29세에 그곳 명찰, 혼묘지(木妙寺) 주지로 명승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13살에 경남 하동에서 납치된 그는 73살에 입적할 때까지 60년간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때 일은 부(父) 여천갑과의 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첫 번째 부친 편지는 일본을 다녀온 ‘조선통신사’를 통해 자식의 생존을 확인하고 부산을 드나드는 일본인 편에 전한다고 되어 있다. ‘그저 살아만 있어라, 그리고 틈이 보이면 탈출해서 부모와 함께 살자’는 간절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한 아들의 답신은 이러했다. 일본의 국법과 경계가 엄해서 불가능하오니 조선의 ‘매’ 두 마리만 사서 보내달라고 써 있다. 일본 영주들은 매를 좋아하므로 한 마리는 ‘대마도’ 영주에게, 또 한 마리는 히고(肥后, 구마모토) 영주에게, 진상, 허락을 받아보겠다고 적었다. 하지만 부친의 회신은 의외였다. 매 유출은 국법이 금하고 있어 그럴 수 없다고 적었다. 이에 여대남은 ‘가토’와 영주 호소카와(전 총리의 선대)에게 간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세 번의 편지 원본은 우리 국내에는 없고 그가 주지로 있던 ‘혼묘지(本妙寺)’에 소장중이며 그 사본은 현재 이인구 이사장과 필자가 소장하고 있다. 여대남의 추모(상견례)행사 경비는 계룡장학회 이 회장이 전담, 조선식으로 거행되었다. 그 때 참여한 장학회 인사로는 이회장, 부처와 성주택, 강영구, 조중원, 서오선, 윤건원 오성균, 이종록, 권도순 그리고 필자 등인데 경남 여씨 문중대표가 합류, 성대하게 치렀다. 일본의 신문, TV도 다투어 취재에 임했다. 이는 임진와란의 아픈 상처를 뒤늦게나마 치유하는 그런 제례였다.

이 밖에도 계룡장학회에선 문화유적 역사탐구를 십 수차례 해온바 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① 규슈(九州) 지방의 백제유적 탐사 ② 요시노가리(吉野里) 추적 ③ 사이토 바루(西都原) 고분묘 조사 ④ 규슈 ‘백제산성’연구 ⑤ 백제촌과 일본의 도요(陶窯) 순례 ⑥ 나고야(名 護屋)성 연구 등을 거쳐 세미나까지 개최한 바 있다. 이렇듯 일본과는 피맺힌 한(恨)을 안고 있으면서도 끊을 수 없는 그런 맥락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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