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느닷없는 울음소리에 병팔이는 번쩍 잠에서 깬다. 동생이 기저귀에 응가를 한 것이다. 안방으로 달렸으나 엄마는 일어나지 않고 내친 바람에 가정부 누나 방에 갔다가 그만 못 볼 걸 보고 만다. 아버지와 식탁에 마주앉은 병팔이. 간밤에 정치의 실체를 단단히 배웠다며 큰소리다. 네, 정치란 국민이 도움을 청해도 묵살하는 정부, 노동자를 성폭행하는 자본가, 똥밭에 뒹구는 우리 미래라고요….
우화(寓話)를 설명하면서 딱딱한 강의에 초라도 칠 겸 이런 군소리를 올렸다. 그랬더니 우리 정치현실의 단면을 통렬히 꼬집은 것으로 이해해준 학생이 많았다. 고마운 일이지만, 커뮤니케이션의 현장에서는 이처럼 모든 사회 실체가 개념적이고 언어적으로 구성되었음을 종종 체험하기도 한다.
지방선거를 예로 들어도 지방권력의 장악 내지 새판 짜기인지 여부를 떠나 그 핵심은 언어다. 말로 인해 탈이 많고 심리적 피로가 쌓이면서도 동물우화 속처럼 '다툼'과 '잔치'가 변주되어 관전이 흥미로울 수 있는 게 또한 선거다. 언어라는 매개가 빠지면 정치적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 할 것이다. 도식적으로는 돈을 묶고 입을 풀어야 좋은 선거로 보이는 이유다.
의미를 더 확장하면 정치인의 말은 정치인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여태껏 공약(公約)과 공약(空約)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언어놀음은 조지 오웰이 말한 더블스피킹(이중어법)일 뿐이었다. 이런 개운찮은 전조가 또 비치려 한다. 정확히 108%, 지난번보다 선거사범이 2배 이상 급증한 것이 이 시점 지방선거의 현주소다.
다행히 더블스피킹의 유혹을 끊자는 시도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유성에서 시·군·구청장들이 공약 지키기를 결의한 매니페스토(manifesto) 선언식도 말하자면 그것이다. 장착취착(將錯就錯)이라는 성어처럼 잘못한 김에 끝까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바닥인 줄 알았는데 지하실일 수도 있다는 반사적 기대감을 갖고 지켜봤다.
우린 그동안 너무 속고 살아왔다. 공약대로라면 지금쯤 경기도에는 24시간 도시철도가 쌩쌩 달리고 있고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충남 어딘가에 한국축구대학이 들어섰어야 한다. 한데 왜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인가. 일단 내뱉은 공약은 언어적 전환을 거친 한낱 액세서리였기 때문이다.
이제 조자룡 헌 칼 쓰듯 써먹던 낡은 방식들과 아주 깨끗이 결별하고 구체화된 정책과 목표, 예산과 실행기간, 지역 특성 타당도와 같은 공약의 정보 가치를 계량화해야 한다. 지역적 합의에 도달하는 정치과정인 지방선거 본연의 기능이 함께 살아날 것이다.
지방이 잘돼야 국가가 바로 선다는 말은 조금도 상투어가 아니다. 지방은 종자를 첫 파종할 시험농장이며 될성부른 품종을 중앙에 옮겨 심는 모판이다. 유력한 지방정부와 유능한 지방의회는 유능한 사람이 들어가야 가능하다. 그 밥에 그 나물, "그까이꺼 대충" 사고는 정치적 한탕주의를 키우는 배양소다.
따라서 각 정당이 공천에서 거르고, 선관위가 '관리'하고, 검·경이 솎아내고, 깨어 있는 유권자가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야 한다. 대전경실련 등 몇몇 단체는 정책선거를 겨냥한 유권자 운동을 공언했다. 약속은 순진한 사람이 쓰는 올가미가 아니며, 치우침 없는 매니페스토는 그 힘있는 대안이다.
자, 어머니를 깨우러 가야 하고 아버지를 말리러 갈 차례다. 지방선거를 치르는 동안은 병달이 형 병팔이가 한번 못 되어볼 것도 없다. 천하가 흥하고 망하는 데는 평범한 사람들의 책임도 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