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빠스는 “만일 인간이 시를 잊어버리면 자기 스스로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면 카오스(태초의 우주상태)로 되돌아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이 처음 숭배한 것은 주술적 힘으로서의 상징이고 이것은 본능적인 동물의 지능을 뛰어 넘는 인간됨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상징으로서의 시를 가장 우위에 두었는데, 오늘날 기술의 발달로 시적인 것이 경시되고 있는 풍조가 안타깝다.
그러나 시인들은 삶의 겉과 속을 오가며 끊임없이 자신의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내려서 시심을 끌어 올리고 있다.
좋은 시를 읽다 보면 봄날 들판에서 만나는 여린 풀꽃의 아름다움에 눈이 부시고, 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시린 아픔 때문에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때로는 울분에 넘쳐 주먹을 불끈 쥐어 보기도 한다. 이것은 시가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의 힘은 위대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한이 많고 노래를 즐기는 시적인 성품을 타고난 민족이라 누구나 시인도 되고 훌륭한 독자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시절 중 고등학교의 국어시간을 겪고 입시를 치른 기성세대들은 교과서에 나온 시 읽기를 입시를 위해 했다.
저자의 약력 주제와 제재의 파악 시대적 배경 등, 이렇게 시를 이론적으로만 공부를 했으니 시적 상상과 정서는 놓칠 수밖에 없다. 어른이 된 뒤에도 시를 어찌 즐길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국어 교육이 시와 독자사이에 깊은 장애물을 만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시를 읽어야 즐겁게 읽을 수 있을까. 마음을 비우고 음식 맛을 보듯 그렇게 시를 맛보라고 권하고 싶다. 음식을 맛보는 사람은 음식의 재료나 만드는 과정을 분석하기 전에 그저 혀에 닿는 맛깔을 느낄 뿐이다. 그러니까 감상(鑑賞)보다는 직관(直觀)으로 즉 ‘맛보기’로 시를 만나는 것은 어떨까.
그래서 시가 나를 흔들어 주면 그 자리에 멈추어서 눈을 감고 시의 향기에 마음껏 취해 보는 것이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답답할 때 위안이 되어주며 상처를 감싸 안아 주는 시, 내면의 추억으로부터 잔잔한 평안과 새로운 삶에 대한 활력을 찾을 수 있는 시, 그런 시를 한 두 편쯤 가까이 두고 애송을 할 수 있다면 삶의 질이 한결 높아 질 것이다.
시는 마음이 가는 바를 말한다고 한다. 자기를 다스려서 자연이나 우주와 같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매운 봄바람 속에서도 봄꽃은 눈을 틔우듯 삶의 매서운 현장 속에서 내 혈관에 신생(新生)의 피돌기를 해 줄 봄꽃 같은 시 한 편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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