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선현들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인류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도리를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다. 인류가 한결같이 행복을 염원하고 있으나 행복을 추구하는 길에 있어서 각자의 방식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행복이란 본래 양면성을 갖고 있으니 외면적인 부귀와 고명도 행복을 이루는 조건이라 할 수가 있으나 내면적인 가치가 보다 우위를 이루어야 되는 것이다.
이 내면적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의 하나가 바로 신의(信義)라고 여겨진다. 이 ‘믿을 신(信)’자는 사람 인(人) 변에 말씀 언(言)이 붙은 것이다. 즉 사람은 말이라면 믿어야 하며 또 미더워야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을 역으로 생각하면 미덥지 아니한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라는 말이 된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면 금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엔 다른 사람이 뻔히 아는 거짓말을 하고서도 진실인 양하거나 쉽게 양심 운운하고 있으며 타인에게 자신의 신의를 인정받으려 하는 자가 적지 않다.
옛말에 ‘사람이 하지 아니하는 일이 있은 뒤에야 가히 함이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으로서 차마 못 할 행위를 하는 자는 참답게 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 아니할 일을 알아서 아니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해야할 일을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미덥지 아니하는 거짓행위를 하는 것일까. 물욕이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채근담(菜根譚)’에는 ‘마음에 욕심이 있어 마음은 어두운 운무(雲霧)에 덮여 있지만 물욕이 없으면 마음이 가을하늘과 같이 밝고 깨끗하며 확 트인 바다처럼 맑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욕심이 양심을 가려 뻔한 거짓말을 하고서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있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다 하여도 자기의 양심은 속일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거짓은 어느 날엔 반드시 밝혀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왕 속이지 못할 바에는 용기를 내어 참됨을 행함으로써 사회를 신의 있는 세계로 만드는 게 참으로 옳은 일이리라.
‘주역’ 손괘(損卦)의 단사(彖辭)에 아랫사람에게서 거두어 위를 더하는 것을 ‘손(損)’이라 하였다. 즉 위정자가 국민을 착취하여 자신을 부유하게 하는 것을 자신에게 이익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나 그 실은 자신에게 손해뿐이라는 것이다. 또 ‘익괘(益卦)’를 보면, 위를 덜어서 아래를 더하는 것을 ‘익(益)’이라 하였다. 현실적 눈으로 보면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듯하나 모든 국민들에게 이익을 준 것이므로 곧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우두머리가 된 자는 국민에게 참다운 이익을 부여할 것을 생각함에 있어 귀감(龜鑑)이 될 말이라 하겠다. 항상 진실한 것을 생각하고 거짓없는 생활을 하면 자신 역시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행복의 진리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가치관에 있는 것인 바, 자신만의 이익과 행복만을 추구한다면 반드시 불행이 초래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을 누리는 데 있어 신의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뜻에서 ‘여람귀신(呂覽貴信)’의 말로 끝을 맺고자 한다. ‘신(信)이 세상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진귀(珍貴)하여 상을 주게 될 것이다.’
이처럼 신(信)이야말로 행복의 바탕이며 복(福)의 근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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