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날수록 3.1운동이 하루의 공휴일, 의례적인 기념일로 화석화되어 가고 있어 가슴 아프다. 나라를 빼앗긴 지 9년 만에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일제의 총칼에 맞서 싸우고 그 과정에서 일제는 시위군중 7509명을 학살하고 1만5961명을 부상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3?운동은 한민족이 결코 일제에 2천만 동포와 3천리 강토와 4천년 역사를 빼앗길 수 없다는 민족적 저항이었다. 3.1운동은 계층. 지역. 종교. 뛰어 넘어 한민족이 하나가 되어 포악한 일제와 비폭력 평화적 방법으로 맞서 조국독립을 요구하는 투쟁이었다. 3.1운동을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상실했던 국권회복을 선언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워 국맥과 법통을 승계하였다. 3.1운동 이전의 모든 항일투쟁과 국권회복운동은 3?운동으로 결집되고, 그 이후의 민족해방 투쟁은 여기에서 발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운동을 계기로 몇 갈래의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전개되고, 이것이 통합을 거쳐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한민족의 정통성과 법통을 잇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왕정복고, 입헌군주제, 사회주의정부 등 여러 가지 정부형태가 논의되었지만, 치열한 토론을 거쳐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고, 이것은 대한민국 건국으로 승계되었다.
3.1운동은 세계혁명사에서도 이와 같은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높은 역사의식을 찾게 된다. 여기에는 몇 갈래의 사상적인 배경과 항쟁의 계기가 접목된다. 첫째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로 인해 온 국민이 국권회복의 열망에 차 있었다. 둘째는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발표로 민족지도자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 독립을 호소하려 하는 등 국제정세를 적극 활용하는 기회를 포착하였다. 셋째는 일본 도쿄의 한국유학생들이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귀국하여 국내에서 3.1항쟁을 준비하였다.
넷째는 1918년 만주 일대에서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만주. 노령. 중국. 미주등 해외 망명지사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다섯째는 국내에서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초기부터 일부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천도교의 손병희?권동??등과 불교계의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측과 불교측의 지도자들을 규합하였다.
3?항쟁의 기본정신은 민족의 자주 독립이었다. 87주년이 되는 지금까지 우리는 분단상태이고 ‘반쪽 자주독립’에 머물러 있어서 3?정신은 현재진행형이 되고 있다. 애국 선열들이 혹독한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독립을 선포하고, 총칼에 희생되면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한 ‘3?정신’을 회복하여 민족통일의 과업을 달성하는 것이 진정한 3?정신의 계승이고 완성이 될 것이다.
3.1운동의 충격과 영향을 받은 중국 북경대학생들은 5.4운동을 일으키면서 한국의 학생들을 본받자고 호소했다. 특히 5?운동을 주도한 북경대학 학생대표 부사년(傅斯年)은 ‘한국독립운동의 교훈’이란 글에서 한국민족의 3?운동 특징을 세 가지로 평가하고 중국민족이 배워야 한다고 제기했다. 첫째, 무기를 갖지 않는 비폭력 혁명이었다. 둘째, 불가능한 것을 알고 한 혁명이었다. 셋째, 순수한 학생혁명이었다고 분석하면서 “혁명사에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3.1절이 어찌 하루 노는 날로 치부되며 그나마 태극기 게양하는 일조차 잊는 날이 되어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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