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배 정치행정부(서울) |
창업(創業)보다 수성(守成)이 얼마나 고난(苦難) 한 일인지 자민련의 명멸과정이 다시금 한 단면으로 상기된다. 김영삼(YS), 김대중(DJ), 노무현 등 전?현??대통령 주변의 정세를 보자. 각기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국민회의에서 새천년민주당으로, 다시 열린우리당으로 허물을 벗어던지듯 입장에 따라 각기 변신을 거듭해 왔다.
이념과 노선에 의한 것이 아니라 특정인물 중심의 정당정치를 해온 결과였다. 여기엔 지역과 연고 우선이란 편협성이 또 다른 인지상정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자민련 태동 역시, 내각제합의를 전제로 한 3당합당(90년)과 YS의 합의각서파기, 이를 연유로 창업동지인 JP조차 거세하려던 과정에서 촉발됐다. 격앙된 집단적 분노와 정의가 창당의 원동력이 됐음은 물론이다. 충청도민의 가슴과 머리는 그런 열정으로 순식간에 젖어들었다.
이른바 ‘충청도 정서’라는 것이 생겨난 것도 이때쯤이다. 뒷골목 깡패조직만도 못한 정치판의 불의와 불신을 심판이라도 하듯, 대구경북에서, 강원도에서 충청도민을 향한 심정적 동조가 잇따랐다. 기존의 종적인 동서갈등을 가로질러 자민련 녹색바람은 횡적 ‘그린벨트’ 지지대 형성을 이뤄냈다. 창당 불과 3개월 만에 전국정당으로 우뚝 선 것이다.
10년 전 충청도민의 가슴을 그렇게 달궜던 자민련이 네 번째 맞는 지방선거를 100여일 앞두고 유성(流星)처럼 사라져갔다. 지난 17대 총선 참패직후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던 맥아더 장군의 심정을 자신의 정계은퇴 심정에 담아 대신했던 창업자 JP. 그가 떠날 때부터 사실상 자민련의 운명도 이미 예고된 일이긴 했다.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했던가. 자민련이 당 간판을 내린 요즘, 정계에서 물러난 노정객 JP의 귀거래사가 부쩍 생각난다. 세 사람을 연이어 용좌에 밀어 올리며 차기대권을 이어받을 명실상부한 2인자로, 또한 두 번의 실세 총리와 9선의 대업을 쌓으며 수십 년 정치를 해온 그였다. 그런 그가 ‘정치가 허업’이라니, 허무주의를 일컫는 말이 아닌가.
오랜 정치생활을 끝낼 때가 되어 주위을 되돌아보니 곁에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던 그가 ‘자민련의 최후’를 어떻게 바라 봤을까. 이런 JP의 반응을 놓고, 갈라선 두 세력사이에 옥신각신 억측이 무성하다. 해석차이 마저도 JP의 남은 유산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추측컨대 ‘한자통합’에 대해 처사촌 처제, 사촌형부 사이인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의 관계에서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JP의 평소 성품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하라말라 강권할리 만무하지 않는가.
자민련의 소멸로 이제 분명한 것은 한국정치에서 ‘3김정치’가 막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추종하던 인걸(人傑)도, 흔적도 모두 사라진 현실에서 한때의 영욕과 평가만 무수할 뿐이다. 그가 말하듯 이제 남은 것은 호주머니의 먼지 뿐 그 어떤 종적도 없다. 오늘날 자민련의 명멸을 바라보는 충청도 민심도 JP와 그 추종세력 이상의 허무와 허망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한때의 인기나 허업(虛業)을 좇기보다 메아리 없는 외침일 지언정 “충청도가 자민련을 버렸어도 자민련은 충청도를 버리지 않았다”는 삼별초와 같은 결기있는 행동파 세력만 있었어도 ‘굿모닝 자민련’으로 되돌려 놓지 않았을까. “자민련이여 이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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