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들은 소록도나 정착촌에서 산다. 말로는 한센인과 이웃에 사는 게 ‘별 문제없다’(63%)거나, ‘아무렇지도 않다’(11%)고 하지만, 실제 동네 목욕탕이나 이발소를 함께 이용하기를 꺼리는 이들이 대부분(80%)이다. 정착촌에 격리하는 것은 불가피한 조처(60%)이고, 한센인 2세와 결혼은 생각할 수 없는 일(87%)이라고 생각한다(국가인권위원회 설문조사).
외롭고 소외받는 이들 한센인들에게 43년 동안 소록도에서 사랑의 봉사를 하던 두 수녀는 아무도 모르게 작년 11월 21일 소록도를 떠났다. 마리안느(1934년) 수녀와 마가렛(1935년) 수녀는 오스트리아 출생으로 인스부르크 종합대학 부속 국립간호 학교를 졸업하고, 지난 62년도에 소록도에 부임한 ‘그리스도왕 시녀회’ 소속 수녀였다.
주민들은 “이럴 수가… 한마디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시다니…” “보답은 커녕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못했는데…”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성당에 모여 두 수녀를 위한 밤샘기도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지난 62년 28살의 나이로 소록도에 온 두 수녀의 봉사활동을 소개하기 위해, 그동안 수많은 신문사?방송??기자들이 이들을 만나보려고 했지만, 인터뷰는 커녕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두 수녀는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떠난다는 말을 미리 하지 않은 이유도 주민들에게 이별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서였다. 한 측근에 따르면, 두 수녀는 육지로 나오는 배에서 소록도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며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43년 생활을 정리한 짐이라곤 낡은 여행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마리안느 수녀는 “43년 전 부모 형제를 떠나 소록도에 올 때는 기뻐서 웃었는데, 막상 떠나려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말했다. 이어 “이곳 할아버지?할머니들에??사랑과 존경을 받은 것만으로도 (보상은)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두 수녀는 1960년대 초부터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에서 보내 준 의약품과 지원금 등으로 환우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60년대에는 한센병 환우들에 대한 국내 관심이 전무하다시피 한 시절이었다. 지원금은 주로 쓰러져가는 초가를 현대식 주택으로 개량하는데 썼다. 또 환우들의 장애교정수술을 주선해 주고, 물리치료기를 도입해 재활의지를 북돋아 줬다. 한센병 자녀 영아원운영 및 보육사업, 재활치료와 계몽, 자활정착사업 등의 공적을 인정받아 국민포장(72년)과 표창장(83년), 국민훈장모란장(96년)을 받기도 했다.
소록도 병원에 근무하는 김광문(제노비오)씨는 “두 할매는 빗자루가 망가지면 청테이프를 붙여 사용할 만큼 청빈하게 살면서 환우들에게 사랑을 쏟았다”며, “종교를 초월해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그들은 살아계신 성모 마리아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말했다.
두 수녀는 친구와 은인들에게 남긴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 부담을 주기 전에 지금이 떠나야 할 때다. 이제 우리가 없어도 환우들을 잘 보살펴주는 간호사들이 있기에 마음 놓고 떠난다”며 “부족한 외국인에게 보내 준 여러분의 사랑과 존경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두 분 수녀님께 하느님의 은총이 늘 함께 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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