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사람이 일부 세대나 계층을 넘어서 천만이나 되는 한국 사람들이 보았다는 것은 결국 이 영화의 이야기가 그 만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리라.
영화는 우리 사회의 속마음, 욕망과 고민을 함께 담는 그릇이다. 얼마 전 연산을 노무현 대통령에 비유하는 한나라당의 논평이 뉴스를 타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연산이 일치하는 면도 분명히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발상으로 해석한다면 한나라당은 영화에 나오는 중신들에 비유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영화에 등장하는 연산, 장생, 공길, 녹수 등 주인공들이나 이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에 이해가 가고 공감을 한다는 것은 이들 주인공들이 겪는 상황이나 문제의식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공감이 가기 때문일 것이며, 그 공감의 정도가 거의 전국민적으로 공유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사회의 문제점 역시 이들 영화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왕의 남자’ 뿐만 아니라 1000만을 돌파한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영화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서의 거울이며 사회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와 마찬가지로 ‘왕의 남자’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비극적 상황에 대한 아픔’이다.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진 특공부대원의 삶이 하릴없이 파멸되는 것을 보여주는 ‘실미도’, 남과 북의 전쟁에 휘말려 고통 받는 가족 형제를 보여주는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렇다.
‘왕의 남자’ 역시 홀로서기를 못하는 상처투성이의 왕과 권력의 암투에 희생되는 서민광대들의 비극적 이야기다. 옆자리에 앉아 눈물을 훔치던 중년의 부부에게서 ‘왕의 남자’가 전달하는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이 한국 최고 히트영화의 공통점은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아픈 현실이다. 어쩔 수 없는 거대한 변화에 개인, 가족 그리고 권력중심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고 그것을 아픔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 놀랍고 슬픈 일은 한국 최고의 흥행작인 이 세 영화 모두에서 이러한 아픔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어떻게 실미도 부대원과 같은 청년들이 이 나라에서 희망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남북 갈등의 상처를 치유하고 가족을 복원할 수 있을까? 왕과 중신이 협력하여 광대들이 꿈꾸는 행복을 이 땅에 가져올 수 있을까?
‘왕의 남자’에 답은 없고 화두만 있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냐?” 그래서 ‘왕의 남자’의 원작인 연극의 제목은 이(爾)인지도 모른다. 너, 그대, 당신이 왕이다. 왕은 없고 왕의 남자만있는 이 시대에 당신 스스로가 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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