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세평] 봄이 오는 소리

  • 오피니언
  • 독자 칼럼

[목요세평] 봄이 오는 소리

  • 승인 2006-02-16 00:00
  • 양홍규 장애인먼저실천운동본부 대전·충남본부장양홍규 장애인먼저실천운동본부 대전·충남본부장
남쪽에서 꽃 소식이 들린다. 세찬 바람과 함께 겨울이 찾아왔는가 했는데, 벌써 유채꽃, 개나리, 벚꽃 등 봄꽃이 조심스레 봄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입춘이 지나 우수가 되면 얼었던 땅이 녹아 봄기운이 돌고 초목이 싹튼다고 했다. 예전에 어른들은 이 시기가 되면 겨우내 넣어둔 농기구를 꺼내 손질하고, 재거름을 부지런히 재워두고, 뽕나무밭에 오줌을 주고, 뒷간을 퍼서 인분으로 두엄을 만들며 한 해 농사를 준비했다. 아낙들은 겨우내 묵은 빨래를 녹아 내린 개울물에 넣어 방망이를 힘차게 두드렸다. 방안에 움츠리고 있던 꼬마들도 밖으로 나와 처마 끝 찾아든 햇빛에 모여 재잘대다가 구슬치기, 자치기, 팽이돌리기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새로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코흘리개 아이들은 엄마 손에 이끌려 먼길을 걸어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예비소집을 다녀왔다.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한 학년 2반이고, 전교생이 600명이 되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조회 시간이 되면 6학년 형의 힘찬 구령에 따라 전교생이 나란히 도열하였고, 뒷줄에서 장난치던 개구쟁이에게는 담임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교장선생님의 훈시 내내 아이들은 몸을 배배 꼬면서 옆줄 아이와 눈웃음을 주고받았다. 다시 교실에 들어서면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 하나 하나를 불러 손톱 검사, 손등의 때 검사를 하곤 했다. 아이들 손에 쥐어진 육성회비 400원을 마련하기 위해 어른들은 독 안의 콩을 퍼 자루에 담아 시장에 내다 팔았다. 학교에 가면 풍금치는 예쁜 손의 여선생님 뒤로 아이들이 모여 새마을 노래를 부르고, 점심시간이 되면 소사 선생님이 학급마다 돌며 마른 밀빵을 나눠주었다.

휴일이 되어 트럭이 한 대 마을로 미끌어져 들어왔다. 트럭 조수로 마을을 떠난 마을 형이 이제는 어엿한 트럭 운전사가 되어 끌고 다니던 트럭을 몰고 부모님께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아이들은 트럭 주변에 모여들어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트럭이 마을을 떠날 때면 새까만 매연 뒤로 꼬리를 물고 마을 어귀까지 달음질하여 트럭을 뒤쫓아갔다. 어느새 초가지붕이 걷히고, 형광등 불빛이 슬레이트 지붕 아래를 밝게 비추더니, 경운기가 한 대씩 들어와 쟁기와 달구지를 대신하고, 마을 앞길이 포장되었다. 4~5km나 되는 먼길을 걸어 초등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은 아버지가 사준 삼천리 자전거를 밟고 신나게 학교까지 몰았다.

젊은이들이 짐을 싸 하나씩, 하나씩 희망을 찾아 도시로 떠났다. 운동장에서 재잘대던 아이들도 남은 아이들의 부러움을 뒤로 한 채 부모를 따라 도시로 떠났다. 한 학년 2반에 전교생 600여명이 되던 학교가 한 학년 10여명, 전교생 5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당국으로부터 폐교 결정이 내려졌다. 덩그러니 남아있는 폐교된 고향의 초등학교.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구교사, 지금은 작게만 보이는 2층 신교사, 아담한 지붕의 교장 관사, 운동장의 수도꼭지, 벽돌로 지어낸 화장실, 철판을 두른 창고, 탱자나무 울타리. 모두 예전 그대로의 모습인데, 이제는 정돈되지 않은 운동장에는 잡풀이 우거져 있고 낙엽만이 뒹굴고 있다.

오랫동안 잊고 살다가 우연히 그곳에 들러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회상해본다. 온 동산을 벌겋게 물들인 진달래꽃을 반기며 동네친구들과 하루 종일 들과 산으로 뛰어 다녔다. 텔레비전도 파아노도 없었고, 영재교육도 영어수업도 없었다. 그저 노닐다가 저녁이 되면 멀리서 들리는 어머니의 부름 소리에 흙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달음질쳐갔다.

지친 몸으로 학원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들에게 고향의 봄이 오는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흘러가는 세월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한 줌의 모래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봄의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가을단풍 새 명소된 대전 장태산휴양림…인근 정신요양시설 응급실 '불안불안'
  2. [사설] 의료계 '정원 조정 방안', 검토할 만하다
  3. [사설] 충남공무원노조가 긍정 평가한 충남도의회
  4. 대전사랑메세나에서 카페소소한과 함께 발달장애인들에게 휘낭시에 선물
  5. 제90차 지역정책포럼 및 학술컨퍼런스 개최
  1. 국방과학일류도시 대전 위한 교류장 열려
  2. '한국탁구 국가대표 2024' 나만의 우표로 만나다
  3.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 학술적 업적 수상 잇달아…이번엔 국제학자상
  4. 건양대병원, 시술과 수술을 한 곳에서 '새 수술센터 개소'
  5. 시민의 안전 책임질 ‘제설 준비 끝’

헤드라인 뉴스


내년 동·서부 학교지원센터 학교 지원 항목 추가… 교원 생존수영 업무에서 손 뗀다

내년 동·서부 학교지원센터 학교 지원 항목 추가… 교원 생존수영 업무에서 손 뗀다

교원들의 골머리를 썩이던 생존 수영 관련 업무가 내년부터 대전 동·서부 학교지원센터로 완전 이관된다. 추가로 교과서 배부, 교내 특별실 재배치 등의 업무도 이관돼 교원들이 학기초에 겪는 업무 부담은 일부 해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26일 대전교육청에 따르면 2025년부터 동·서부교육청 학교지원센터(이하 센터)가 기존 지원항목 중 5개 항목의 지원범위를 확대하고 학교에서 맡던 업무 4개를 추가로 지원한다. 먼저 센터 지원항목 중 교원들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생존 수영 관련 업무는 내년부터 교사들의 손을 완전히 떠나게 된다. 현재 센터에..

[기획] 대전, 트램부터 신교통수단까지… 도시균형발전 초석
[기획] 대전, 트램부터 신교통수단까지… 도시균형발전 초석

대전시가 충청권 메가시티 완성의 시작점인 광역교통망 구축에 힘을 쏟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도시철도 2호선 트램부터 신교통수단 시범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도시균형발전 초석을 다지는 것을 넘어 충청 광역 교통망의 거점 도시가 되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28년 만에 도시철도 2호선 트램이 올해 연말 착공한다. 도시철도 2호선은 과거 1995년 계획을 시작으로 96년 건설교통부 기본계획 승인을 받으면서 추진 됐다. 이후 2012년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면서 사업이 물꼬를 틀 것으로 기대됐지만 자기부상열차에서 트램으로 계획이 변경되면..

대전 유통업계, 크리스마스 대목 잡아라... 트리와 대대적 마케팅으로 분주
대전 유통업계, 크리스마스 대목 잡아라... 트리와 대대적 마케팅으로 분주

대전 유통업계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크리스마스트리와 대대적인 마케팅으로 겨울철 대목을 노리고 있다. 우선 대전신세계 Art&Science는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26일 백화점 1층 중앙보이드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선보였다. 크리스마스 연출은 '조이 에브리웨어(Joy Everywhere)'를 테마로 조성했으며, 크리스마스트리 외에도 건물 외관 역시 크리스마스 조명과 미디어 파사드를 준비해 백화점을 찾은 고객이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대전 신세계는 12월 24일까지 매일 선물이 쏟아지는 '어드벤..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 가을의 끝자락 ‘낙엽쌓인 도심’ 가을의 끝자락 ‘낙엽쌓인 도심’

  • ‘우크라이나에 군사지원·전쟁개입 하지 말라’ ‘우크라이나에 군사지원·전쟁개입 하지 말라’

  • 시민의 안전 책임질 ‘제설 준비 끝’ 시민의 안전 책임질 ‘제설 준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