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자태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만 늘 불평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장미는 어느 날, 밤이면 춥고 어두운 화단이 싫으니 거실로 옮겨 달라고 주인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장미를 거실로 옮겨 주었다. 며칠 후 장미는 주인에게 또 다시 불평을 하며 거실은 따뜻해서 좋으나 나비가 찾아오지 않으니 다시 창가로 옮겨 달라고 한다. 주인은 장미가 원하는 대로 옮겨주었다.
하루 만에 장미는 창가에 있는 것이 싫다며 방안 꽃병에 꽂아달라고 했다. 이번에도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장미를 화분에서 꽃병으로 옮겨 방안에 두었다. 며칠 후 장미는 또다시 햇살이 있는 바깥 화단으로 옮겨달라고 주인에게 말했다. 그러나 장미는 이미 뿌리가 잘려 시들어 버렸고 주인은 시들어 버린 장미를 뽑아 바깥 화단에 심는 대신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다.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이 왜 쓰레기통에 버려져야만 했을까? 자신의 자리와 처지에 감사하며 만족함을 몰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좋은 환경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환경이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져야 행복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산해진미를 먹으며 산다 해도 만족을 모르고 불평을 터뜨린다면 이는 필경 불행이다. 어떤 사람은 단칸방에서 불편하고 힘든 생활을 해도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산다. 영국의 종교가 윌리엄 로우는 만족과 행복을 가장 빨리 찾는 비결은 범사에 감사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나 환경에 만족해하며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행복의 지름 길이다. 초대 교회 교부였던 크리소 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감사하지 않는 마음이 바로 죄라고 지적했다. 감사해야 할 사람이 감사 하지 않는 것은 죄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감사하지 않는 죄를 벌하는 형벌은 없다. 왜 감사하지 않는 죄를 벌하는 형벌이 없는 것일까? 탈무드에 그 이유를 생각할만한 명언이 하나 있다. 감사를 모르는 자를 벌하는 법을 하나님께서 만들지 아니한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를 이미 불행으로 벌하셨기 때문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미 불행이라는 벌을 받고 있기 때문에 다시 벌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우리의 삶을 훈훈하게 지펴주는 불씨와도 같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 우리네 삶의 주변을 꽃향기처럼 향기롭게 한다.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이 남자로 태어난 사실과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에 태어난 사실, 그리고 헬라인으로 태어난 세 가지 사실에 대하여 감사한다고 말했다.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의 조건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감사할 조건이 있고,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감사할 조건이 있다. 부단히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는 사람은 마치 금광에서 금을 캐내는 광부의 행복 같은 것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교훈했다.
소아마비로 하반신을 쓰지 못하고 휠체어에 몸을 맡긴 채 활동하는 어느 나이 어린 소녀의 기도를 잊을 수가 없다. “예수님 고마워요. 오른손으로 글씨를 쓸 수 있게 해주시고 입으로 찬송 할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라는 소녀의 기도 속에서 콧등이 시큰해지는 감동을 받았다.
감사하는 마음은 영혼을 살찌우는 양약임에 틀림없다. 예수님처럼 온순하고 겸손하게 살되, 늘 감사하면서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아름다운 삶을 살면 인생 자체가 밝게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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