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날만큼은 부엌문을 꼭 잠가 놓지 않는다. 그러나 부엌문이 나무로 돼 있어 아무리 소리 내지 않고 열려고 애를 써도 ‘삐그덕’소리를 낸다. 이때 미리 준비한 바가지에 담은 물을 조심스럽게 붓고 나면 소리 없이 문을 열 수 있어 계획했던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우리 어린 시절에 대보름은 재미와 설렘이 있었고, 설날 못지 않은 큰 의미가 있었다. 정월에 있는 세시풍속 중 절반이나 되는 50여건이 대보름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짐작이 된다. 그러나 요즘엔 어떤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젊은 세대들은 우리의 전통풍습인 대보름보다는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블랙데이 등 이름도, 뜻도 아리송한 날들을 애써 기억하며 즐겁게 생각하고 의미를 두게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국적 불명의 풍속 아닌 풍습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젊은이들의 문화의식을 누구의 책임으로 돌려야하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 것에 애착하는 분위기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개운치 않고 씁쓸하기까지 하다. 음력이 천대를 받는 요즈음 같아서는 별다른 대보름을 쇠기가 만만치 않다. 다행히 집안에 고고하신 어르신들이라도 계신다면 귀 밝으라는 귀밝이술과 부스럼 나지 말라는 부럼 깨물기는 있음직하다. 좀 더 유난스러운 집 같으면 오곡밥에 취를 복쌈을 싸먹을 수도 있을 것이고, 하다못해 호박고지와 무시래기는 삶아 진미라도 볼 수 있는 것이 정월 대보름의 분위기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도 퍽 다행스러운 것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행해졌던 다채로운 행사 중에 우리지역에서도 마을의 안녕과 농경의 풍년을 기원하고, 질병과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용왕제, 장승제, 탑제, 당산제, 공주말 디딜방아 등을 비롯하여 지신밟기, 달불놀이, 널뛰기, 투호놀이, 제기차기, 윷놀이, 엿치기, 연날리기 등 세세년년(世世年年) 이어져오는 풍속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풍습들을 담아내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휘하여 우리 젊은 세대들의 시선을 우리 것으로 돌릴 수 있도록 다 같이 각자의 위치에서 생각해보는 정월대보름였으면 참 좋겠다. 오순도순 한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오곡밥, 복을 싸는 복쌈, 액을 쫓는 약밥, 더위 막는 진채식, 귀가 밝아지는 귀밝이술, 부스럼을 없애는 부럼깨물기 등 맛·건강·행운을 담아내는 ‘일석삼조’의 다양한 상품들을 세상에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제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한다. 그 고민의 결과 전통의 내음이 풍기게 상품을 포장하고 아름답게 꾸며 사람들의 관심을 붙들 수 있다면 밸런타인데이에 불티나게 팔리는 초콜릿을 능가함은 물론 나아가서는 한국의 전통미까지 곁들여져 지방화를 뛰어넘어 세계화, 국제화가 되는 바로미터가 되지 않을까?
이번 대보름에는 찹쌀, 찰수수, 팥, 차조, 콩 종류의 곡식을 섞어서 만든 오곡밥과 호박이나 가지, 시래기, 곰취 같은 나물들을 정성스럽게 마주 대하며 가족들끼리 둘러앉아 보름 밥을 먹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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